내용 요약
정의
일제강점기 때, 충청남도 천안의 아우내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어 옥중에서 순국한 독립운동가.
개설
유관순의 고향은 철도가 부설되기 전 서울과 충청남도 공주를 연결하는 교통로로서 선교사들이 집중적으로 개신교를 전파하던 곳이었고, 이에 따라 많은 교회가 생겨나게 되었다. 지령리에도 1901년경 이미 교회가 들어섰으나, 1907년 8월 국채보상운동에 이 교회가 동참하는 등 애국활동을 펼치자, 그 해 11월 일본군의 방화로 소실되었다. 유관순의 일가인 유빈기(柳斌基)는 케이블(E. M. Cable, 한국명 奇怡富) 선교사와 함께 고향에 개신교를 중흥시키고자, 1908년 조인원(趙仁元) 등과 함께 불타버린 지령리 교회를 다시 세웠다. 이후 숙부 유중무가 선교사로 교회를 이끌면서 유관순도 5∼6세를 전후하여 개신교를 접하게 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서거하자 학생들은 자진해서 상복을 입고, 휴교에 들어갔으며, 2월 28일에는 정기모임을 통해 전교생이 적극적으로 만세를 부르기로 결의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이화학당 학생인 신특실(申特實), 노예달(盧禮達) 등은 파고다공원에서 벌어진 3 · 1 운동에 직접 참여하였고, 당시 고등과 1학년인 유관순은 서명학 · 김복순 · 김희자 · 국현숙 등과 함께 ‘5인의 결사대’를 결성하여, 소복을 하고 기숙사를 빠져나와 대한문 앞에서 망곡(望哭)을 한 뒤, 남대문으로 향하는 시위 행렬에 합류하였다.
이후 3월 5일, 학생 연합 시위가 벌어졌는데, 이화학당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정보를 미리 알아낸 학교 측은 교문을 잠그고, 교사들로 하여금 교정 곳곳을 지키게 하였으나, 많은 학생들이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 중 신특실 · 유점선 · 노예달 등은 검거되었고, 교사 김독실(金篤實) 등은 투옥되었다. 이날 유관순도 만세를 부르다가 일경에 붙잡혔으나 곧 석방되었다. 학생들의 시위가 극심해지자 일제는 3월 10일 전국적으로 휴교령을 내렸고, 학교로 갈 수 없게 된 유관순은 13일 기차를 통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때 고향으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친구들이 기차소리를 듣고, ‘동전 한 푼, 동전 한 푼’ 하는 소리로 들린다고 하자, 유관순은 ‘대한 독립, 대한 독립’ 하는 소리로 들린다고 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고향에 돌아온 유관순은 부친 유중권과 조인원 등 마을 어른들에게 서울에서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고, 숨겨온 독립선언서를 내놓으며, 병천 시장에서의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상의하였다. 유관순과 사촌 언니 유예도는 만세운동에 주민들이 사용할 태극기를 만드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였고, 1919년 4월 1일, 조인원 · 유중권 · 유중무 등과 함께 병천 시장에서 수천 명이 참여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이었다. 이날 유관순의 부모를 포함하여 19명이 시위 현장에서 순국하였으며, 30여 명이 큰 부상을 당하였다.
유관순은 주도자로 체포되어 공주교도소에 수감되었고, 이곳에서 공주영명학교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구속된 친오빠 유우석을 만나기도 하였다. 5월 9일, 유관순은 공주지방법원에서 5년형을 언도받았고, 중형을 받은 사람들과 경성복심법원으로 넘겨져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언도받았다. 함께 재판 받은 사람들은 모두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일제의 재판권을 인정하지 않은 유관순은 상고하지 않았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은 이신애, 어윤희 등과 함께 1920년 3월 1일 오후 2시를 기해 3 · 1운동 1주년 기념식을 갖고,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3천여 명의 수감자들이 크게 호응하여 만세 소리가 밖으로까지 퍼져나갔고, 만세를 외치는 함성에 형무소 주위로 인파가 몰려들어 전차 통행이 마비되고, 경찰 기마대가 출동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유관순은 물론, 많은 애국지사가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1920년 4월 28일 영친왕(英親王)의 결혼 기념 특사령으로 유관순의 형기도 1년 6개월로 단축되었으나, 오랫동안 계속된 고문과 영양실조로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유관순은 18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이화학당은 형무소 당국에 유관순 시신의 인도를 요구하였으나 일제는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이화학당 교장 월터(Miss Jeanette Walter)는 이 사실을 미국 신문에 알려 세계 여론에 호소하겠다고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결국 일제는 해외 언론에 알리지 않고, 장례는 극히 조용히 치러야 한다는 조건을 붙여 시신을 인도하였다.
1920년 10월 12일, 유관순의 시신이 이화학당으로 돌아오자 학생들은 통곡으로 맞이하였다. 시신은 이화학당 수위실에 안치하였고, 세브란스 교의를 불러 수습하였다. 유관순의 직접적인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수형기록표의 사진을 통해서 심한 구타와 영양실조 등의 부작용에 따른 갑상선 기능저하증을 주된 원인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10월 14일 이화학당 측은 정동교회 김종우 목사의 주례로 이태원 공동묘지에서 조촐히 장례를 지냈다. 이후 일제가 이태원 공동묘지를 군용기지로 개발하면서, 유관순의 묘는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되었으나 실전(失傳) 되었고, 현재 유관순 생가의 뒷산인 매봉산에 초혼묘(招魂墓)가 봉안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참고문헌
- 『高興柳氏派譜』(1936)
- 『고흥유씨세보』(1995)
- 『불꽃같은 삶, 영원한 빛 유관순』(이정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4)
- 『매봉교회가 낳은 민족의 보배 유관순』(홍석창, 한국감리교회사학회, 2004)
- 『순국처녀 유관순전』필사본(유제한, 1948년 이전)
- 「얼굴학적으로 보는 유관순 열사의 신장」(조용진, 『유관순연구』18, 2013)
- 「유관순 열사 1심 형량 관계: 형사사건부」(임명순, 『한국독립운동사연구』28, 2007)
- 「유관순의 사상형성배경연구」(박충순, 『유관순연구』5, 2006)
- 「남동순 여사 인터뷰」(『순국소녀 유관순』1, 2003)
- 「보각스님 인터뷰」(『순국소녀 유관순』1, 2003)
- 「유관순과 3·1운동」(박충순, 『유관순연구』1, 2002)
- 「충청남도 공문」문공: 1080-937호 (1976년 9월 18일)
- 「경성복심법원 판결문」대정8년 공 제172호 (경성복심법원, 1920)
주석
-
주1
: 먼 곳에서 임금이나 어버이의 상사를 당했을 때에, 곡을 할 장소에 몸소 가지 못하고 그쪽을 향하여 슬피 욺.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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