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여 처음으로 신교육을 접했으며, 졸업 후에는 관리의 꿈을 버리고 사업가로 성공하려고 친구와 함께 만주로 떠났다. 그러나 친구가 주3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현장을 보고 국내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때 김종우는 하늘의 음성을 듣고 인간 영혼의 구원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본격적인 신학 훈련을 위해 피어선 성경학원에 입학하였다.
1913년부터 정동교회 목사 현순(玄楯) 밑에서 전도사로서의 훈련을 쌓아갔다. 현순 목사를 따라 4개월간 새벽마다 남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기도하던 중 깊은 종교적 체험을 하였다. 이때 받은 은혜의 체험으로 훗날 유명한 주4와 주5로 성공하였다. 1915년 피어선 성경학원을 졸업한 후 감리교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였고, 1917년에 졸업하였다.
1916년 집사 목사 주6를 받았으며, 1917년 동대문교회 담임 목사로 부임하였고, 2년 뒤 정동교회 담임 목사로 부임할 정도로 주7 실력과 설교의 능력을 인정받았다. 정동교회에서의 제1차 목회(1919~1927) 중 정동교회를 크게 부흥시켰다. 1923년 국내에서는 최초로 ‘하기 아동 성경학교’를 개설했으며, 1927년부터 1929년까지 2년간 경성 지방의 주8로 인사와 행정을 맡았다. 1929년부터 3년간 상동교회를, 1932년부터 2년간 수표교회를 담임하다가, 1934년부터 다시 정동교회로 돌아와 4년간의 제2차 정동교회 목회시대를 열었다.
1938년 10월 기독교조선감리회 총회에서 2일 동안 21회에 걸쳐 투표를 해도 감독 당선자가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3일째에 총회원들이 피곤한 상태에 있을 때 창문으로 비둘기 1마리가 들어와 김종우 앞에 내려 앉았다. 총대들이 이 광경을 보고 김종우에게 절대 다수 표를 주어 제3대 감독으로 선출되었다. 이 일을 통해 전체 조선감리교회의 행정을 맡은 책임자로 감독직을 수행하였으며 계속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감리교를 영적으로 크게 부흥시켰다.
그러나 감독직을 1년밖에 수행하지 못한 채 1939년 9월 17일 병으로 사망하였다. 1939년 9월 21일 정동제일교회에서 ‘감리교회장’이 치뤄졌다. 김종우의 온화한 인품과 영력이 넘치는 설교, 그리고 부흥 운동은 당시 한국 교회와 백성들에게 큰 위안과 소망을 심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