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강화 출신. 유학자인 아버지의 가르침 아래 한학공부를 하다가 아버지를 따라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4년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여 처음으로 신교육에 접하게 되었으며, 졸업 후에는 관리의 꿈을 버리고 사업가로 성공하려고 친구와 같이 만주와 멀리 중국의 쑤저우(蘇州)와 항저우(杭州) 등지에서 1년간 방황하다가 그의 친구가 마적단에 의해 피살되는 현장을 보게 되었다.
그 때 인간영혼의 구원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귀국하여 1914년서울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에 입학하였고, 정동교회 목사 현순(玄楯) 밑에서 전도사로서의 훈련을 쌓아갔다.
현순을 따라서 4개월간 새벽마다 남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기도하던 중 깊은 종교적 체험을 하였다. 이 때 받은 은혜의 체험으로 후에 유명한 부흥사와 목회자로 성공하게 되었다.
1916년에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1917년에 신학교를 졸업하면서 동대문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였고, 2년 뒤 정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할 정도로 목회실력과 설교의 능력을 인정받았다.
정동교회에서의 제1차 목회(1919∼1927)중 정동교회를 크게 부흥시켰다. 한편, 1923년에는 국내에서는 최초로 ‘하기아동성경학교’를 개설하였으며, 정동교회에서의 8년간의 제1차 목회 뒤에 1927년부터 1929년까지 2년간 서울지방의 감리사로 인사와 행정을 맡아보았다.
1929년부터 3년간 상동교회를, 1932년부터 2년간 수표교회를 담임하다가, 1934년부터 다시 정동교회로 돌아와 4년간의 제2차 정동교회 목회시대를 열었다.
이렇게 두 번에 걸쳐 12년간 정동교회에서 목회하였을 뿐 아니라 행정가와 영력(靈力)이 넘치는 설교가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1938년의 정기총회에서 양주삼(梁柱三)에 이어 제3대 감독으로 선출되었고, 전체 감리교회의 행정을 맡은 책임자로 감독직을 잘 수행하였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계속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감리교를 영적으로 크게 부흥시켰다. 그의 죽음으로 감독직은 2년 만에 끝났으나 온화한 인품과 영력에 넘치는 설교, 그리고 각종 부흥운동은 당시 민중들에게 큰 위안과 소망을 심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