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공자 학도의 교학(敎學) 내용을 의미함으로써 유교(儒敎)·유도(儒道)·유술(儒術)과 같은 말로 쓰이며, 때로는 유교를 공부하는 사람의 의미로 쓰여 유가(儒家)·유문(儒門)·유림(儒林) 등과 통용하여 사용되기도 한다.
근대 서구 합리주의의 영향으로 인해 유학은 특히 학문적·이론적 영역으로 이해되고 있는 데 비하여, 유교는 교화적·실천적 영역으로 이해됨으로써 둘 사이를 구별하는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전통적 의미에서 보면 유학과 유교 양자는 서로 배제하는 측면이라기보다는 서로 영역이 겹치는 유의어(類義語)로서 혼용되었다.
‘유학’이라는 말이 고전 문헌 속에 나타나는 경우는 『사기(史記)』 오종세가편(五宗世家篇)의 “하간헌왕(河間獻王) 덕(德)이 유학을 좋아하였다.”는 구절이 있다.
또 『후한서(後漢書)』 복담전편(伏湛傳篇)의 “여러 세대에 유학을 하여 평소 명성과 신망을 지녔다.”는 구절 그리고, 『북사(北史)』 심리전편(沈里傳篇)의 “심리는 유학을 하는 데 마음을 오로지하여 천리를 멀다 하지 않고 스승을 따랐다.”는 구절 등이 있다.
유학자(儒學者)의 전기를 수록한 중국의 역사서는 『사기』·『한서』 등처럼 ‘유림전(儒林傳)’으로 싣기도 하고, 『구당서(舊唐書)』·『원사(元史)』 등에서처럼 ‘유학전(儒學傳)’으로 싣기도 하여 두 용어를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지방에 세운 학교를 ‘유학’이라 하기도 하고, 원나라 때는 지방에 세운 학교의 사무를 담당하는 관청을 ‘유학제거사(儒學提擧司)’라 일컬었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 유학은 유교 속에서도 학교 내지 학문과 연관된 측면을 가리켰음을 알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태조 1년(1392) 각 도의 수령에게 ‘유학교수관(儒學敎授官)’의 직책을 부여했는데, 이것도 지방의 향교를 관장함으로써 유교 교육을 책임지는 직책이다.
또한, 태종 6년(1406)에는 좌정승인 하륜(河崙)의 건의로 10학(學)을 설치하였는데 그 첫째가 ‘유학’이었다. 이때의 ‘유학’은 시험 과목으로서 현임 3관(館)의 7품관 이하에게만 응시 자격이 주어졌다.
유학의 학문적 내용을 제시한 글은 근세에 나오기 시작한다. 한 말의 보수적 도학자의 한 사람이었던 전우(田愚)가 지은 「유학(儒學)」(1912)에는 “여러 군자들과 자손들에게 보인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여기에서 그는 유학의 일반적인 정의로서 ‘유교인의 학문(儒者之學)’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는 유학의 기본 과제를 두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곧, 마음이 ‘활동할 때와 고요할 때(動靜)’, 그리고 몸이 ‘세상에 나섰을 때와 물러나 고향에 머무를 때(出處)’의 두 가지로서 양쪽 모두 이치에 합치되도록 요구한다.
나아가 그는 유학이 핵심 가치로 삼는 것은 도덕임을 확인하고 있다. 이러한 유학적 가치의 확립을 위해 그 표준에 상반되는 경우를 지목해 경계하는데, 심령(心靈)을 떠받드는 불교는 다른 종교(他家)의 방법이라 규정하고, 이진상(李震相) 등의 ‘심즉리설(心卽理說)’도 마음에 치우침으로써 유학을 벗어난 것이라 비판한다.
다른 한편, 사공(事功)에 전적으로 힘쓰는 것에 대해서는, 이는 세속적인 유교인의 사업이라 하여 비판적으로 규정한다. 따라서, 그는 마음(심령)과 몸(사공)이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도리에 일치하여 조화 있게 활동되는 것을 유학의 이상으로 제시하고 있다.
전우와 같은 시대의 도학자인 송은헌(宋殷憲)이 지은 「유학설(儒學說)」은 정호섭(鄭浩燮)에게 주는 글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그도 여기에서 전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유학의 기본 의미를 ‘유교인의 학문(儒者之學)’이라 지적한다. 그만큼 한 말에 오면 유학의 개념적 내용이 그 학문적 성격에 있다는 공통된 이해가 성립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유학의 내용을 규정하면서, 인간의 삶에는 오륜(五倫 : 父子·君臣·夫婦·長幼·朋友 사이의 윤리)이 있어서 모든 인간의 규범을 포함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인간의 성품에는 오상(五常 : 仁·義·禮·智·信)이 있어서 모든 선을 갖추고 있다고 규정한다.
나아가 그는 이 오륜으로써 인류에게 기준과 다양성을 제시하여 질서 있게 차례 지으며, 동시에 오상의 도리로써 인간의 심성을 꿰뚫는다면 인간이 인간되는 이치가 갖추어지게 되어, 우주의 질서에 참여하고(參天地) 그 변화를 돕는다(贊化育)고 확인한다.
따라서, 그는 오륜과 오상은 우주를 유지하는 들보와 기둥[棟樑]이요,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기둥과 주추[柱石]라 정의하고 있다.
이와 같이, 유학의 기본 내용을 오륜의 도덕 규범과 오상의 도덕적 성품으로 제시하는 유학 개념은 그만큼 도덕 중심적인 이해임에 틀림없다. 사실상 그는 인간이 해야 할 학문으로서 유학은 이 오륜과 오상을 ‘닦아서 밝히고 확장하며 충실화시켜야 할 것(修明擴充)’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요·순 이래로 여러 성왕(聖王)과 선진시대의 공자·맹자(孟子)에서 송나라 때의 정호(程顥)·정기, 주희(朱熹)에 이르기까지 여러 성사(聖師)가 가르치고 밝혔던 일이라고 확인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유학의 도덕적 기본 성격에 대한 이해가 제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유학은 도덕에만 머무르지 않고 전체적인 인간의 실현을 추구하는 학문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송은헌은 유학의 학문 방법(爲學之要)에 주목하면서, 그 기본적 요령[體要]으로서, 근본을 세우는 ‘거경(居敬)’, 앎을 이루는 ‘궁리(窮理)’, 실천을 하는 ‘역행(力行)’의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경(敬)’은 마음을 간직하고 성품을 길러 인간의 몸과 마음 전체를 거느리는 공부다.
경전과 역사를 강론하여 밝게 이해하는 것은 ‘치지(致知)’로서 앎[知]의 문제다. 오륜과 오상을 실천해 나가는 것은 ‘역행’으로서 행위(行)의 문제다.
그러나 송은헌은 앎과 행위는 서로 닦아서 응용에 통달하는 공부요, 또한 ‘경’은 ‘치지’와 ‘역행’ 양자를 총괄하여 꿰뚫고 있는 것이라 규정함으로써, ‘경’으로써 인식과 실천을 종합하는 유학의 학문 방법을 체계화하고 있다.
여기서 유학은 일상적 생활 규범으로서의 도덕 체계일 뿐만 아니라, 인식론과 행위론을 수양론으로 종합한 매우 복합적인 학문 체계이며 도덕성을 그 기본 성격으로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는 지(知 : 致知·窮理)·행(行 : 實踐·力行)·경(敬 : 居敬·立本)의 세 기본 요령을 유학의 모든 학문 방법에 적용되고 있는 보편적 구조로 파악, 제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공자가 제시한 사교(四敎)인 문(文)·행(行)·충(忠)·신(信)의 경우에도, 그는 ‘문’으로 가르치는 것은 치지(致知)요, ‘행’으로 가르치는 것은 실천이요, ‘충’과 ‘신’으로 가르치는 것은 근본을 세우는 것(立本)으로 파악, 지(知)·행(行)·경(敬)의 세 기본 요령에 수렴시키고 있다.
또한, 『중용』의 학(學)·문(問)·사(思)·변(辨)·행(行)의 다섯 요소도 분석해보면, ‘지’와 ‘행’의 두 단서로 수렴되고, 이를 성(誠)으로 관철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
나아가 『대학』의 8조목(格物·致知·誠意·正心·修身·齊家·治國·平天下)도 ‘지’와 ‘행’의 두 단서로 수렴되고, 이를 ‘경’으로 관철하는 것이라 제시한다.
그 밖에 『맹자』에도 ‘부동심(不動心)’은 성경(誠敬)에서 연유하고, ‘지언(知言)’은 궁리(窮理)에서 연유하며, ‘양기(養氣)’는 집의(集義)에 연유하는 것으로 분석한다.
그리고 주자가 올린 주차(奏箚)에서도 “엄숙하고 공경하여 두려워한다(嚴恭寅畏).”는 것은 근본을 세우는[立本] 일이요, “독서하고 궁리한다(讀書窮理).”는 것은 앎을 이루는[致知] 일이요, “일에 대응하고 사물을 접한다(應事接物).”는 것은 실천[踐履]의 일이라며 세 요소로 파악한다.
나아가 이이(李珥)는 『격몽요결(擊蒙要訣)』에서 ‘거경’은 근본을 세우는 일이요, ‘궁리’는 선(善)을 밝히는 일이요, ‘역행’은 실제로 행하는 것이라 규정하면서, 이 세 가지를 종신토록 추구해야 할 사업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인식과 실천과 수양을 학문의 세 기본 요소로 확인하는 유학의 성격은 이론적인 지식 체계로서의 근대적 학문과는 구별된다. 실천하지 않는 지식은 지식이 불완전하고 치우친 현상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유학은 인간 삶의 다양성을 포괄하고 있으며, 이상적이고 모범적인 인격의 실현을 학문의 기본 과제로 내포하고 있다.
특히, 실천의 영역을 포함하는 것은 전통적 학문관이 지닌 인격 완성의 실현을 위한 필수적 조건으로 강조되고, 수양의 구체적 방법과 과제는 유학의 인간 이상을 실현하는 방법으로서 독특한 형식으로 개발되어 왔다. 유학은 자신의 방법과 내용을 명확하게 인식함으로써 거기서 벗어난 입장에 대한 강한 비판적 태도를 내포하고 있다.
송은헌도 「유학설」에서 마음 곧 영각(靈覺)을 배양하는 데 전념하는 것은 불교의, 사사롭게 하는 관습(自私之習)이라 규정하고, 마음의 양지(良知) 곧 영식(靈識)을 지키기만 하고 학문의 강론(講學)에 힘쓰지 않는 것은 육구연(陸九淵)·왕수인(王守仁)의 치우친 학문(偏詖之學)이라 지적한다.
그리고 성품을 함양하지 않고 글귀를 기억해 암송하거나 이론의 세련된 토론을 내세우는 것은 세속적인 유학자의, 입과 귀로만 익히는 공부(口耳之習)라 규정해 비판한다. 학문의 정통성을 확인하는 작업은 동시에 그 정통성에 위배되는 것을 심사해 이단으로 배척하는 활동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한말 유학자의 한 사람인 신기선(申箕善)은 『유학경위(儒學經緯)』(1896)를 저술, ‘유학’의 학문적 체계화를 추구하고 있다. 이 책은 이기(理氣)·천지형체(天地形體)·인도(人道)·학술(學術)·우주술찬(宇宙述贊)의 5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의 편차를 통해서 이미 ‘유학’은 도덕성이 강조되는 데에서 벗어나 우주론과 지식 체계에 관한 비중이 크게 늘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기편」은 성리학적 형이상학의 기본 범주인 ‘이’와 ‘기’의 개념을 해석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에 비해 「천지형체편」에서는 서양의 지식을 수용해 자연과학적 지식으로서 천문학의 기본적 이해를 설명하고 있다.
「인도편」에서는 형이상학과 자연과학의 양면을 포함하는 우주의 이해를 전제로, 이 우주와 인간의 관계를 통해 인간의 성품을 성리학적으로 해명하고 있다. 「학술편」에서는 ‘거경’·‘궁리’·‘역행’의 세 조목을 학문하는 강령(綱領)으로 제시하고 있다.
또한, 도학의 도통론(道統論)과 벽이단론(闢異端論)의 입장에서 유학의 정통을 확인한다. 곧, 주자를 정점으로 하는 송나라의 학통과 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송시열(宋時烈)·권상하(權尙夏)·김창협(金昌協)으로 이어지는 자신의 학풍을 중심으로 한 한국의 도통을 제시한다.
그리고 노장(老莊)·불교·야소교(기독교)를 이단으로 규정, 비판한다. 그는 학문하는 데에서의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그 순서로 『소학』에서 시작하여 사서·오경·역사·고급의 문장으로 나아갈 것을 요구한다.
특히, 『소학』은 ‘사람의 모습을 만드는 것(做人之樣子)’이라 규정하고, 사서는 ‘도에 들어가는 문(入道之門)’이라 지적한다. 그리고 오경은 ‘도를 싣고 있는 글(載道之文)’이라 제시하고, 역사는 ‘우주의 변화(宇宙之事變)’라 설명하고 있다.
「우주술찬편」에서는 중국의 상고시대로부터 청나라까지, 우리 나라의 단군·기자로부터 조선 왕조까지의 역사를 언급하고, 나아가 6대주에 걸친 세계 각 국의 정세까지 설명하고 있다.
『유학경위』는 서술이 비록 산만하지만 근세에 일종의 유학 교과서로 시도된 최초의 저술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구성 체계는 철학·자연과학·유학의 기본 방법과 체계 그리고 역사의 네 영역을 포함하는 종합 과학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한국의 근대 유학은 모든 학문을 포괄하는 종합적 학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양의 근대 학문 체계가 점차 깊이 침투, 확산되면서 자연과학과 역사의 영역은 유학에서 떨어져 나가고, 철학과 경학을 중심으로 한 유학의 방법 체계만이 남게 되었다. 그것을 『유학경위』에서 보면 ‘이기’·‘인도’·‘학술’ 부분만 남고, ‘천지형체’와 ‘우주술찬’은 유학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는 것이다.
개항 이후 한말에서 일제 강점기에 걸쳐 활동했던 도학자들은 유교 전통과 국가 존립이 위협받는 역사적 위기 속에서 매우 확고한 신념과 정열로써 학문적 업적을 이루고 있다.
이 시기 이른바 한 말 도학자들이 남긴 학문적 업적은 그 자체 유학으로서 제기된 것은 아니지만, 매우 정밀한 학문적 체계화를 수행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유학의 영역 속에 포함시킬 수 있다.
이항로(李恒老)의 학통인 화서학파는 주희의 문집 가운데 의문점을 검토해 방대한 『주자대전집차의집보(朱子大全集箚疑輯補)』를 편찬하고, 유교적 역사 의식에서 『송원화동사합편강목(宋元華東史合編綱目)』을 완성하였다.
이항로의 제자 김평묵(金平默)에 의한 『정서분류집의(程書分類集疑)』와 『근사록부주(近思錄附註)』의 편찬도, 성리학의 교과서적 기본 저술에 대한 분류와 주석 및 의문점에 대한 검토를 본격적으로 수행하는 학문적 자세를 보여 준다.
송병선(宋秉璿)은 조선시대 대표적 유학자들의 학설을 모아 『근사속록(近思續錄)』을 편찬했으며, 도학자들의 언론과 행적에 관한 기록을 모은 『패동연원록(浿東淵源錄)』과 도학적 왕도 정치론에 관한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논설을 모아 『무계만집(武溪謾輯)』을 편찬하였다.
또한 그는 『통감강목』의 체계를 우리 나라 역사에 적용시켜 『동감강목(東鑑綱目)』을 편찬하였다. 송병선의 이러한 저술은 우리의 유학사와 유학 사상 및 우리 역사의 유교적 해석을 추구하고 있는 점에서 도학의 국학화를 시도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으며, 한국 유학의 소중한 성과다.
이진상은 『가례』를 주석한 예학의 업적으로서 『사례집요(四禮輯要)』를 편찬하고, 『춘추』의 경학적 주석서로서 『춘추집전(春秋集傳)』·『춘추익전(春秋翼傳)』을 저술하였다. 그리고 그는 유학의 수양론적 체계화로서 『천고심형(千古心衡)』·『직자심결(直字心訣)』을 저술하였다.
그의 가장 탁월한 학문적 업적은 『이학종요(理學綜要)』이다. 이 저술에서 그는 기본 개념을 중심으로 성리학의 정연한 체계를 세우고 자신의 성리학적 입장을 관철하는 교과서적 편찬을 완성하였다.
한 말 도학자들은 성리학·예학·경학·역사·이단비판론 등에 관한 방대한 저술을 남길 정도로 학문적 열정이 넘쳤다.
특히, 이항로를 중심으로 한 화서학파 안팎에서의 성리설 논쟁과 기정진(奇正鎭)·이진상·전우 등이 심(心) 개념을 중심으로 벌인 성리설 논쟁은 가장 선명한 독창성을 보여 주는 것으로서 이 시대 성리설의 학문적 수준을 높여 주었다.
유학, 곧 유교의 학문적 연구에서 근대적 성과는 애국 계몽 사상가들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 초기의 업적으로는 장지연(張志淵)의 『조선유교연원(朝鮮儒敎淵源)』(1922)을 들 수 있다.
책의 제목이 ‘유교’로 표시되어 있는 것은 당시에도 유교의 교화적 이해와 학문적 이해가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실제로 그는 이 책에서 ‘유교’와 ‘유학’을 혼용해 쓰고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그것이 한국 유학사의 통사적 서술을 시도한 최초의 저술이라는 점이다.
특히, 이 책은 성리학의 이론적 쟁점을 부각시키고, 호락학파(湖洛學派)·경가양파(京嘉兩派) 등 유학의 학파적 분류를 개념화했으며, ‘호남 유학(湖南儒學)’ 등 지역 학맥과 서북(西北)지역 유학자들에 대한 관심을 보여 준다. 그리고 그가 ‘근세 유학계’로 일컫는 당대의 학계에 예민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한국 유학사 연구는 이병도(李丙燾)에 의해 『자료한국유학사초고(資料韓國儒學史草稿)』(1937, 1959 간행)가 저술됨으로써 더욱 체계적으로 정리되었다. 이와 함께 전통적인 유학사의 형태인 『동유학안(東儒學案)』(1943)이 하겸진(河謙鎭)에 의해 저술되었다.
유학의 한 전문 분야로서 양명학에 대한 관심도 일찍부터 일어났다. 박은식(朴殷植)은 『왕양명실기(王陽明實記)』(1910)에서 자신의 학문적 입장인 양명학에 서서 왕수인(王守仁)의 양지 개념(良知槪念)과 깨달음의 방법 등을 밝혔다.
그는 양명학의 이론을 근대에 학문적으로 연구한 최초의 인물이다. 이 양명학은 조선시대의 도학(주자학)적 전통과 달리 한국 유학의 새로운 학풍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박은식에 이어서 1930년대에 정인보(鄭寅普)는 『양명학연론(陽明學演論)』을 저술해 한국 양명학파의 확립을 시도하였다. 이 무렵 이능화(李能和)는 「조선유계지양명학파(朝鮮儒界之陽明學派)」(1937)를 통해 한국 양명학파에 관한 연구 논문을 제출했고, 이어서 일본인 다카하시(高橋亨)도 「조선의 양명학파」를 발표하고 있다.
1930년대에서는 국학(國學)에 대한 관심을 계기로 정약용(丁若鏞)과 실학 사상에 관한 연구가 활기 있게 싹트기 시작하였다. 문일평(文一平)의 「고증학상으로 본 정다산」(1935)을 비롯해 최익한(崔益翰)의 「여유당전서를 독(讀)함」(1939) 등은 유학의 한 분야로서 실학에 관한 연구를 개척하고 있다.
1900년대 이후 중국의 변법 사상가인 캉유웨이(康有爲)·량치차오(梁啓超)의 영향을 받아 유교의 종교성에 관한 이론적 연구가 확산되었다. 박은식·장지연·이승희(李承熙)·유인식(柳寅植)·이병헌(李炳憲) 등이 유교 개혁 사상으로서 새로운 유학 이론을 제기하고 있다.
특히, 만주에서 활동하던 이승희는 아동 교과서인 『천자문(千字文)』의 새로운 형태인 『정몽유어(正蒙類語)』를 편찬하고, 『내칙장구(內則章句)』·『가범(家範)』·『여범(女範)』·『가의(家儀)』 등 여성 교육을 위한 유학 교과서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그의 『곡례장구(曲禮章句)』는 예학의 경전 주석서다.
또한, 이병헌은 캉유웨이로부터 금문경학(今文經學) 내지 공양학(公羊學)을 전수받아 많은 경전 주석서를 저술한 독보적 인물이다.
박장현(朴章鉉)은 우리 역사를 경전 체제로 서술한 『해동서경(海東書經)』·『해동춘추(海東春秋)』를 저술하고, 『논어』와 『맹자』를 주제별로 분류한 『논어유집(論語類集)』·『맹자유집(孟子類集)』을 저술, 경학의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1945년 이후 한국의 유학 연구는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 전통의 엄격한 계승도 아니요, 식민지 시대의 학풍을 지속하는 것도 아니다. 역사의 주체로서 전통 사상을 재평가하면서 시대사적 발전 방향과의 관계 속에서 유학의 학문적 위상을 정립해 가고 있다.
초기에는 서구식 근대화의 추구와 전통 양식의 광범한 개혁에 따라 한동안 심한 침체에 빠졌으나, 사회의 기반으로서의 전통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대두되면서 매우 활발한 속도로 학문적 발전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특징으로는 첫째, 유학의 학문적 연구 방법으로서 철학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현상이 나타났으며, 이에 따라 유학을 종교적 영역과 분리시키려는 태도가 뚜렷해졌다. 둘째, 유학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대학과 학과가 설립되어 안정된 학문적 기반을 확보하였다.
셋째, 전통 사회의 유학에 포함되었던 많은 영역이 분리되었으나 다양한 분야로 전문화되어 가는 현상을 보여 준다. 넷째, 최근에 유학의 학문적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엄청난 업적이 축적되고, 새로운 연구가 시도되고 있다.
유학이 내포하던 종교적 신념을 거부하고 철학의 영역 속에 자기 위치를 확인하는 현상은 전통 유학과 현대 유학 사이의 결정적 차이를 보여 준다.
이러한 현대 유학은 종교를 미신적이고 비학문적인 것으로 규정하면서 근대적 이성의 가치를 받아들이고 있다. 이에 따라 유학의 이론영역, 특히 성리설을 중심으로 하는 관념적 이론에 관한 연구가 유학 연구의 주류를 이루었다.
최근에 와서 실학과 양명학의 연구가 유학 영역에서도 활발해졌지만, 제도적·실용적·역사적 관심은 대체로 버리고 형이상학적 내지 논리적 이론 연구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유학의 학문성을 확보하는 데는 기여하지만, 유학이 확보할 수 있는 다양한 영역을 포기하고 폐쇄적인 좁은 영역에 스스로를 한정시키는 단점도 있다.
전통 사회의 유교 교육 기관으로서 최고 학부인 성균관(成均館)은 광복 이후 성균관대학교로 되어 초기에는 ‘동양철학과’란 명칭으로 유학 교육의 연구 활동이 이루었다.
그러나 1965년부터는 ‘유학과(儒學科)’로 학과명이 설정되고, 한 때 ‘유교학과(儒敎學科)’로 명칭이 바뀌었지만 다시 ‘유학과’로 정착되었다.
여기에서 유학 연구의 전문 인력이 양성되면서 각 대학의 철학과에서도 동양 철학의 분야로서 유학 교육과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유학 연구는 전문화되면서 분화하게 되었다. 주제, 학파, 인물, 시대, 연구 방법 등에 따라 구분되는 영역들이다.
주제별로는 성리학 연구가 가장 광범하게 확산되었다. 그리고 성리학 안에서도 이기론(理氣論)과 사칠론(四七論), 인물성론(人物性論)의 문제 등 특수 주제에 대한 연구도 전문화되고 있다.
그 밖에 예학에 관한 연구도 최근에 비상한 관심으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88년 한국예학회(韓國禮學會)가 조직되어 예학 분야의 전문 학자들이 집결되면서 매우 활발한 연구가 일어나 예학에 관한 경학적·의례적·역사적·민속적 연구와 가례(家禮)·국조례(國朝禮) 등의 연구로 확산되고 있다.
의리론의 문제는 특히 민족 의식과 연관되어 의병 운동 또는 병자호란 이후의 화이론(華夷論) 등 시대에 따라 전개되는 양상에 관한 연구가 다양하게 제기된다. 수양론은 유학의 고전적 핵심과제로서, 특히 ‘경(敬)’의 개념과 연관되어 학파 또는 인물 연구를 중심으로 축적되고 있다.
유학의 철학적 주제로서 인식론·가치론·형이상학·해석학 등도 다양하게 시도되고 있다. 학파와 연관되어 도학의 기호학파와 영남학파 및 그 내부의 인물 중심의 많은 학파들이 학문적 쟁점과 인맥을 중심으로 분석되고 있다.
대표적 학파는 성리학을 중심으로 한 학파 이외에도 양명학파(혹은 강화학파)·실학파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개화파, 애국 계몽 사상파 등에 대해서도 비교적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인물의 연구는 거장 유학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이황·이이·정약용 등의 개인 사상을 연구하는 연구소들이 많이 결성되어 활동하고 있다. 특히, 퇴계학연구소는 국제 학술 회의를 여러 차례 개최, 외국 학자들도 많이 참여하고 있다. 이와 함께 인물의 학술 사상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퇴계학·율곡학·다산학 등의 독자적인 학문 체계로서 제기되기도 한다.
시대별 연구는 주로 유학사적 연구 방법에 의해 추구되고 있다. 한국 유학사에 대한 연구는 학설의 이론적 연구와 해당 시대 사회의 역사적 배경을 연결해 해석하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조선시대 성리학사인 배종호(裵宗鎬)의 『한국유학사』(1978)와 고려시대 유학사인 김충렬(金忠烈)의 『고려유학사』(1984)는 시대사 연구의 중요한 업적이다.
유승국(柳承國)의 『한국의 유교』(1976)는 삼국시대사를 중심으로 한 통사이며, 윤사순(尹絲淳)의 『한국유학논구』(1980)는 조선시대 유학사에 대한 문제 중심의 접근이다. 유명종(劉明鍾)의 『조선 후기 성리학』(1985)이나 윤남한(尹南漢)의 『조선시대의 양명학연구』(1982)는 학파별·시대별 연구의 종합이다.
1970년대 이후는 한국 유학의 연구에 중대한 전환기를 드러내고 있다. 많은 전문 연구 학자들이 대학에서 연구하며, 더구나 이들 전문학자들이 조직한 유교학회(1985)를 비롯, 공자학회·동양철학회 등에서 유학 연구의 조직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최근 경제적 성장에 따라 각 문중이 선조 선양 사업의 일환으로 인물의 사상을 연구하는 학회에서 발표회를 갖게 되는 것도 유학 연구의 업적을 축적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고 있다.
한국 유학을 전체적으로 개관하면, 방대한 문헌 자료가 있는 데 비해 아직도 연구는 충분하지 않아, 많은 미개척 분야를 지니고 있다. 특히, 특정한 분야에 치우친 관심에서 나아가 균형 있는 연구가 이루어진다면 학문적 비중이 매우 높아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오랜 역사를 지녔으면서도 젊은 학문 분야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