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세는 세상을 경륜한다는 말로, 국가사회를 질서 있게 영위하는 정치·경제·사회의 활동을 가리키고, 치용은 현실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고 성취해가기 위해 적절한 제도와 방법을 갖추고 실천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경세는 그 목적의 실현을 위하여 사회적 제도와 다양한 수단을 필요로 함으로 치용을 요구하게 되는 것인데, 그러한 두 개념이 결합하여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경세치용이라는 용어는 고전문헌에서 사용된 것이라기보다는 주로 근세의 학술용어로서 널리 사용되었고, 특히 청나라 초기나 조선 후기의 이른바 실학파에 관한 설명에서 일반적으로 쓰여지고 있다. 또한 경세치용은 실학파와 관련된 학문적 지식체계의 특정한 입장이나 방법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지만, 경세론과 치용론으로 분리하여 사용되는 경우와 그 의미를 구별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경세론 또는 경세학을 국가사회의 현실적 정치·경제·사회에 관한 학문적 이론이나 지식체계라 한다면, 그것은 실학파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고대사상에서부터 연원하는 기본적인 학문적 관심이며, 특히 유교사상의 기본적 과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치용론 또는 치용학은 전한시대의 경학을 가리키는 경우에서처럼, 유교의 경학이 현실 문제에 응용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을 뜻하기도 하고, 경세치용론의 경우처럼 일반적으로 현실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도와 방법에 관한 이론의 탐구를 뜻하기도 한다.
경세론은 유교의 근본원리와 직결되어 있는 문제로 이해되고 있다. 곧, ≪대학≫에서 제시된 명명덕(明明德)과 친민(親民)의 기본강령이나, 유교의 기본 원리로 받아들여지는 수기(修己)와 치인(治人) 또는 내성(內聖)과 외왕(外王)의 원리에 있어서 친민·치인·외왕의 문제는 경세론의 영역으로서, 곧 명명덕·수기·내성의 문제인 수양론과 상응하는 두 가지 근본 원리의 한 쪽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거기서 사회적이고 현실적인 경세론은 내면적·인격적인 수양론과 상호 조화적인 관련성을 추구하는 것이 유교이념의 근본입장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여야만 경세론의 의미도 유교사상 속에서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경세론의 고전적 형태는 유교경전 속에 상당한 깊이로 제시되어 있다. ≪서경≫은 첫머리의 요전(堯典)·순전(舜典)·대우모(大禹謨) 등을 통하여 성왕(聖王)의 통치원리와 통치형태의 모범을 제시하였으며, 홍범편(洪範篇)에서도 통치의 실제적 과제와 원리를 아홉 가지의 범주로 집약하여 체계화시켜주었다.
≪서경≫에서는 천명사상과 덕치의 정치이념을 기초로 하면서 제도·법률·생산·재화·의례·천문 등 정치적 과제를 구체적이며 모범적인 형식으로 제시함으로써 경세론의 유교적 이상형과 연원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주례≫는 주나라의 관직제도에 관한 기록으로 전하며, 여기서 제시된 육관제도는 남북조시대의 북주에서부터 청나라 말기까지 중국정치제도의 기본 형식을 이루었고, 고려와 조선시대의 육부나 육조도 그것을 따랐던 것이다.
공자도 춘추 말기의 혼란 속에서 정치적 질서를 회복하려는 의지를 보여주었고, 덕치 내지 예치의 정치이념을 정립하였다. 그리고 맹자에 이르면 왕도론을 통하여 민생 안정을 위한 정전제(井田制)의 원리나 세법에 이르기까지 경제적 기반에 바탕을 둔 정치적 이상의 실현을 추구하는 구체적 방법을 제시하는 경세론을 전개하고 있다.
이처럼 선진시대(先秦時代)의 유학사상에서 이미 현실적인 경세론이 사상적 핵심의 구성요소를 이루고 있음을 경전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한나라 때에 유교가 국가종교로 확립되면서 정치적 현실 문제는 항상 유교경전과 결합되어 해결방법이 논의되었고, 그만큼 경세론은 유학이념과 깊이 연관된 전통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유교경전의 현실적인 경세론의 관심은 궁극적 초월세계나 인격적 내면세계에 대한 관심과 균형 있는 조화를 이루지 못할 때 사상적인 모순과 불균형을 노출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고 재조정하는 과정에서 경세론의 사상사적인 특성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송대의 도학파는 경세론의 현실적 관심이 형이상학적 근원성이나 인격적 도덕성에 근거를 확립하지 못하는 결함을 반성하면서 현실의 근거로서 이념적 근원성을 추구하는 철학적 영역인 성리학의 연구에 관심을 집중하였다.
성리학에서는 본말(本末)·체용(體用)·도기(道器)·이기(理氣) 등의 개념형식으로 문제를 분석하면서 본(本)·체(體)·도(道)·이(理)를 근본적이고 선행적인 것으로 파악함으로써 태극이나 천리(天理)·성명(性命) 등 형이상학적 성리학의 문제를 중요시하였다.
그러나 정치와 경제의 현실적 문제도 본에 대한 말, 체에 대한 용, 도에 대한 기(器)의 관계처럼, 서로 대대적(對待的)이고 상응적인 것인만큼 배제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도학파에 있어서도 경세론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임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주희(朱熹)에 의해 제안된 사창법(社倉法)은 사회 및 경제정책으로서 중요한 기능을 하였고, 도학파의 정치활동은 왕도정치의 이상을 추구하면서 실제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도 사실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주자학의 철학적 이념에 기초를 둔 도학적 정치이념은 조선왕조의 통치이념과 정치질서를 형성해갔다.
정도전(鄭道傳)은 ≪조선경국전≫에서 치전(治典)·부전(賦典)·예전(禮典)·정전(政典)·헌전(憲典)·공전(工典)의 육관제도에 따른 정치원리와 행정제도를 논의하였고, ≪경제문감≫에서도 재상의 직무를 비롯한 각 관직과 군왕의 도리에 관해 역사적 사례를 통해 인식하려는 경세론의 체계적 전개를 보여주고 있다.
조선시대 도학의 정립에 중요한 계기를 이루었던 조광조(趙光祖)의 경우에서도 그가 국가기강을 확립하여 왕도를 구현하고 지치(至治)를 추구하였던 것은, 곧 도학파에서 차지하는 경세론의 중요성을 쉽게 확인할 수 있게 한다.
이이(李珥)는 성리학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호문답 東湖問答≫이나 ≪만언봉사 萬言封事≫ 등의 저술에서 현실적 정치질서의 확립을 위해 치밀한 분석과 대책을 제시하는 경세론의 깊이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성학집요 聖學輯要≫는 수기·정가(正家)·위정(爲政)을 기본 구조로 하면서, 위정에서 도학파의 정치원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도학파의 경세론적 입장과 범위를 보여준다.
그러나 도학파에서 형이상학적 성리학의 문제나 도덕적 수양론에 치중하는 경향이 심화되었을 때 경세론은 관념적 체계의 제약을 심하게 받게 되고, 그만큼 경세론의 객관적 내지 실용적 독립성은 위축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실학파는 중국에서는 청나라 초기에 고염무(顧炎武)·황종희(黃宗羲) 등에 의해 형성되었다. 조선 후기에 유형원(柳馨遠)·이익(李瀷) 등은 실학을 추구하면서 도학파의 입장이나 체계로부터 한 걸음 나아가 독자적인 경세론의 영역을 개척하였다고 할 수 있다. 경세치용이라는 용어는, 특히 이들 실학파의 학문적 관심이나 방법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양계초(梁啓超)는 청나라 초기에 고염무에 의해 전개된 학문 연구의 방법인 귀창(貴創)·박증(博證)·치용을 분석하면서, 특히 치용론은 실용주의를 표방하여 학문과 사회의 관계를 긴밀하게 추구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일반적으로 그와 더불어 청나라 초기의 실학파나 청나라 말기의 공양학파(公羊學派)가 지닌 현실사회문제에 대한 실용적 관심이 경세치용학으로 인식된다.
따라서 경세치용은 청나라 때나 조선 후기의 실학파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이해되었으며, 경세론의 일반적 정치사회에의 관심을 넣어서 실학파의 경세론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이고 있는 것이 통념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실학파에서 경세치용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업적을 남긴 대표적 사상가로는 유형원·이익·정약용 등을 들 수 있다. 오광운(吳光運)은 유형원의 ≪반계수록 磻溪隨錄≫ 서문에서 진한시대 이후로 옛 치도가 무너진 뒤 사대부가 경세유용(經世有用)의 학문이 있음을 모르고 있는데, 유형원이 홀로 경방제치(經邦制治)의 도리에 뜻을 두었으며, 그의 이론이 모두 실용에 적합하다고 언급하였다. 그러한 지적은, 곧 유형원의 주장이 경세치용의 내용임을 평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반계수록≫은 전제(田制)·교선제(敎選制)·임관제(任官制)·직관제·녹제(祿制)·병제·군현제를 내용으로 하여, 제도의 합리적 형식을 검토하고 개혁안을 제시한 것이다.
그는 전제에 있어서 정전제를 바탕으로 균전법을 실현하려는 공전제를 주장하여 토지가 천하의 큰 근본임을 강조하였다. 더 나아가 토지제도는 사람을 기본으로 할 것이 아니라 땅을 기준으로 하여야 한다고 역설하여 제도의 객관적 표준을 확립하려는 실학파의 사상적 입장을 밝히고 있다.
또한 그는 법제를 장인의 먹줄과 자[繩尺]에 비유하고, 야공(冶工)의 기본틀[模範]에 비유하면서, 척도가 없이 올바른 생산이 불가능한 것처럼 법제가 바르지 않고서는 정치가 온전할 수 없음을 지적하였다.
뿐만 아니라, 근본과 지말(枝末)이 서로 떠날 수 없다는 원리를 눈금[星]과 저울[衡]이나 그물코[目]와 벼리[綱], 또는 치[寸]와 자[尺]의 관계에 비유하여, 구체적 사무가 중요함을 역설함으로써 현실성과 실용성에 관심을 깊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익도 유형원의 경세치용론에 깊은 영향을 받아 정치제도의 실용적 개혁안에 관한 연구를 다양하게 하였다. 이익은 토지제도에 관해서 현실적으로 실행가능한 개혁방법으로 한전제(限田制)를 제안하고, 선비도 농업생산에 종사하게 함으로써 무위도식을 금하게 하자는 사농합일(士農合一)의 주장을 비롯하여, 화폐나 조세 등 경제문제나 행정기구의 기능을 재검토하고 개혁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 밖에도 유수원(柳壽垣)의 ≪우서 迂書≫나 홍대용(洪大容)의 ≪임하경륜 林下經綸≫ 등도 실학파에서 나온 경세치용론의 체계적 탐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사회의 제도 전반에 걸친 실용적 정리의 체계화는 정약용에 의하여 가장 방대하고 치밀하게 추구되었다.
그의 저술에서 1표2서(一表二書)라고 일컬어지는 ≪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신서≫는 행정제도와 기능에 관한 종합적인 재구성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기본적으로 ≪주례≫의 육관제도에 근거를 두어 전통적인 행정기구의 기본 형태를 받아들이지만, 각 직관에 따른 기능과 원칙을 실용적·현실적 정신에서 철저히 검토하고 실천방법을 제시하였다.
≪경세유표≫의 원래 명칭은 ≪방례초본 邦禮草本≫인데, 주나라 때 중국의 제도인 ≪주례≫에 상응하여 우리 나라의 현실에 적합한 제도로서 방례(邦禮)를 논의하는 경세치용적 의식을 엿볼 수 있다.
그는 ≪경세유표≫의 서문에서도 성왕의 이상적 전형인 요·순을 팔짱끼고 말없이 있어도 세상을 교화한 인물로 설명하는 것은 전적으로 거짓이라 하고, 천하 사람을 바쁘고 시끄럽게 노역시키면서 일찍이 숨 쉴 틈도 없게 만든 사람이 요·순이라 하여 적극적 실천과 행동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실천성은 곧 실용성을 내포하게 되며, 그만큼 경세론이 치용론과 결합된 실학파의 경세치용론으로 뚜렷이 드러날 수 있다.
≪목민심서≫에서도 목민관이 실천해야 할 12강(綱) 72목(目)으로 체계화시키면서, 육관(六官)에 해당하는 육전(六典)의 직무와 더불어 목민관의 도덕적 기반으로 율기(律己)·봉공(奉公)·애민(愛民)의 3강령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실학파의 경세치용론이 단순한 행정제도나 경제원리에 관한 현실적 정책론에 머물지 않고, 그 실천원리에는 도덕적 근거를 내포하며 도덕성과 정책론이 결합된 경세론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실학파의 경세치용론은 유교사상의 기본 원리로서 수기와 치인 내지 내성과 외왕의 조화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며, 선진유교의 경세론에서부터 도학파의 경세론으로 흐르는 전통의 일관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도(道)와 기(器)의 문제에서 경세치용론이 기, 곧 제도 내지 현실에 치중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도와 대립되어 기를 추구하는 입장이 아니라 도를 기반으로 하고 이상으로 지향하면서, 기 곧 현실적·실용적인 정치·경제·사회의 문제에 실천적인 해결방법을 탐구하고 제시해가는 입장이라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