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송원상(宋元相). 서울 출신.
1919년 3·1운동 때 목사로서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그 뒤 평화회의가 열리는 중국 상해(上海)에 밀파되어 주도자인 미국 대통령 윌슨(Wilson, T. W.)과 평화회의측에 독립청원서를 전달하였다.
그래서 평화회의에 참석하는 각국 대표에게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독립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시켜 주었다. 그래서 한국독립을 찬성하도록 고조시키는 한편 한국과 파리와의 통신연락을 취하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 국내외의 독립지사가 상해에 모이자, 이광수(李光洙) · 선우혁(鮮于爀) 등과 함께 프랑스 조계 바오창로(寶昌路)에 임시독립사무소를 개설하고, 총무로 위임받아 각국에 독립선언서를 발부하였다.
같은 해 서울에서 개최된 국내 13도대표의 국민대회(國民大會)에서 평정관(評政官)으로 선임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4월 10일 이동녕(李東寧) · 손정도(孫貞道) 등 29명과 함께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하고 조소앙(趙素昻) · 남형우(南亨祐) · 이시영(李始榮) · 한기악(韓基岳) 등이 기초한 임시헌장 10개 조를 통과시킴으로써 4월 13일 역사적인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그리고 외무차장이 되었으며, 그 뒤 정부의 조직 개편으로 외무위원에 선임되었다.
같은 해 8월 5일 내무부 차장에 임명되었으며, 9월 20일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특파원으로 노령(露領) · 만주 등지에서 많은 활동을 전개하였다. 귀환한 뒤 11월 14일 내무부 차장직을 사임하였다.
1920년 4월 21일 구미위원부 위원으로 안현경(安顯景)과 함께 상해를 떠나 미국 뉴욕에 도착하여, 구미위원부 위원장서리에 추대되어 외교공세를 펴기도 하였다. 1922년 7월 안창호(安昌浩) · 이동녕(李東寧) · 김구(金九) · 차리석(車利錫) · 여운형(呂運亨) · 이시영 · 노백린(盧伯麟) · 홍진(洪震) 등 10여 명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외곽단체인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여 주요 간부로 활동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