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명오(明五), 호는 월봉(月峰). 강원도 원성 출신.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한 뒤 이승복(李昇馥)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 국내에서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조소앙(趙素昻)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수립,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다. 곧 법무부 위원에 선임되어 입법활동에 참여하였다.
그 뒤 귀국해 중앙학교에 근무하다가 『동아일보』 창간에 동인으로 가담하였다. 동아일보사에 근무하면서 조선청년회연합기성회 발기인으로 참여, 한국청년운동을 위한 핵심 기구를 설치, 운영하도록 기초를 닦았다.
또한 조선노동공제회를 조직하고 기관지로 『공제(共濟)』를 발간하면서 한국청년의 진로 등을 제시하였다. 1924년 7월 동아일보사의 정치부장과 편집국장직을 맡아 필봉으로 동을 격려, 고무해 일제의 탄압 일변도의 만행을 규탄, 성토하였다. 동시에 조선물산장려회 이사로 선출되어 활약하였다.
1925년 『시대일보(時代日報)』 편집국장을 지냈다. 이해에 월간 『개벽』 잡지가 항일민족기사로 인해 조선총독부로부터 정간처분을 당하였다. 언론 동지인 송진우(宋鎭禹)·민태원(閔泰瑗)과 같이 사이토[齋藤實] 총독을 찾아가 항변, 해금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1927년 2월 신간회(新幹會)의 발기인으로 참가,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1928년부터 4년간 조선일보사의 편집국장으로 재직하면서 필봉으로 민족계몽운동과 항일투쟁을 하였다. 1935년부터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인재 교육에 헌신하면서 이 학교의 감사로도 재직하였다.
1983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