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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
단체
1922년 중국 상해(上海)에서 조직된 항일독립운동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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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22년 중국 상해(上海)에서 조직된 항일독립운동 단체.
개설

각 독립운동단체의 지도자들이 국민대표회의 소집 문제를 포함한 몇 가지 현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직하였다.

설립목적

1919년 성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실력양성론과 외교독립론에 입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으나 곧 침체에 빠지고 말았다.

이에 1921년 독립운동전선 내부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과 전체 독립운동의 방향전환을 논의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 개최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 같은 논의는 1922년 5월 국민대표회주비회(國民代表會籌備會)가 국민대표회의 ‘소집선언서’를 발표하고 임시의정원에 후원을 요청하는 ‘인민청원안’을 제출함에 따라 구체화되었다.

그런데 임시의정원에서는 의원 상호간 심한 의견 차이만 노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형권(韓馨權)이 소련 정부로부터 받아온 독립운동 원조금 20만루불 사용 문제까지 겹치면서 독립운동전선 내부에서는 심각한 정쟁과 파쟁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러한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 조직된 것이다.

기능과 역할

회원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독립운동 단체의 주도적 인물들로, 안창호(安昌浩)·김덕진(金德鎭)·최일(崔日)·한진교(韓鎭敎)·최여식(崔呂植)·신익희(申翼熙)·조완(趙完)·홍진(洪鎭)·차리석(車利錫)·정영준(鄭永俊)·원세훈(元世勳)·김인전(金仁全)·연병호(延秉昊)·김철(金徹)·유기준(劉基俊)·안정근(安定根)·남형우(南亨祐)·김용철(金容喆)·오영선(吳永善)·이기룡(李起龍)·손정도(孫貞道)·이탁(李鐸)·도인권(都寅權)·최대윤(崔大尹)·민병덕(閔丙德)·조상섭(趙尙燮)·이진산(李震山)·이유필(李裕弼)·중숙(中肅)·옥관빈(玉觀彬)·이필규(李駜珪)·양기하(梁基瑕)·여운형(呂運亨)·양헌(梁瀗)·현순(玄楯)·이동녕(李東寧)·김구(金九)·최일(崔一)·노백린(盧伯麟)·천세헌(千世憲)·장붕(張鵬)·김홍서(金弘敍)·민충식(閔忠植)·이시영(李始榮)·곽영(郭英)·조소앙(趙素昻)·윤기섭(尹琦燮)·김현구(金鉉九)·김만겸(金萬謙)·심상완(沈相完)·최준(崔俊) 등이었다.

독립운동전선에 현안으로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립운동 단체의 지도자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그러나 상호간 노선의 차이가 크고, 이해 관계에 따라 대립이 심각했을 뿐만 아니라 도중에 임시의정원 의원과 이승만(李承晩)옹호파들이 전원 탈퇴함으로써, 1922년 8월 11일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해체되었다.

참고문헌

『독립유공자공훈록(獨立有功者功勳錄)』 5(국가보훈처, 1988)
『대한민국임시정부사(大韓民國臨時政府史)』(이현희, 집문당, 1982)
『朝鮮獨立運動』 Ⅱ(金正明 編, 原書房,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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