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 명칭은 구미주차한국위원회(歐美駐箚韓國委員會, Korean Commission to America and Europe)이다.
1919년 5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였던 이승만(李承晩)은, 한성정부(漢城政府)의 집정관총재(執政官總裁) 자격으로 워싱턴에 집정관총재사무소를 설치, 대미외교 업무를 수행하였다.
같은 해 9월 각지의 정부를 흡수 통합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대통령으로 선임되자, 같은 달 프랑스 파리에 설치되었던 주파리위원부와 필라델피아에 설치되었던 대한민국통신부를 통합, 구미위원부를 조직하였다.
업무는 김규식(金奎植) · 이대위(李大偉) · 임병직(林炳稷) 등이 맡아서 처리했으며, 고문으로는 미국인 돌프(Dolph,F.A.) · 스테거(Staggers,J.W.) · 윌리엄스(Williams,J.J.)가 위촉되었다. 설립 초기에는 미국 행정부를 상대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합법성을 인정받기 위해 주력했으나, 미국 행정부의 냉담으로 전혀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이에 따라 미국 시민들을 상대로 한국 문제를 인식시켜 여론을 환기시키는 방향으로 목표를 바꾸고, 일제의 야만적인 학정을 폭로하고 미국 시민 중 동조자를 얻는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3·1운동 당시 일본의 야만적 행동을 세계에 널리 알리는 한편, 수많은 책자를 발간하고 강연회 · 연설회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으로 한국의 독립 문제가 세계에 여론화되는 한편, 미국 국회에 네 차례에 걸쳐 의제로 상정되어 격렬한 논의가 벌어졌다.
또한 미국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을 중심으로 한국의 독립을 후원하기 위한 한국친우회가 결성되기도 하였다. 여기에 힘입어 1921년에는 미국 워싱턴에서 개최된 태평양회의에서 활발하게 외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적법한 절차 없이 이승만이 자의로 설치하고 독단으로 운영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알력이 잦았다.
더욱이 이승만이 대통령직을 사임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외교 업무를 수행, 그 부당성이 노출되었다. 1925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의해 폐지가 결정되었으나, 이승만에 의해 계속 존속되다 1928년 재정난으로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