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봉소(鳳所), 호는 석오(石吾, 石五, 石梧)·암산(巖山). 충청남도 천원(天原 : 지금의 천안시) 출신. 아버지는 영해군수를 지낸 이병옥(李炳鋈)이고, 어머니는 광주안씨이다.
고향 서당에서 전통 교육을 받고 10세 때 충청북도 청원군 문의면 후곡리의 할아버지 이석구(李錫九)의 집에서 소년시절을 보냈다. 1885년 일가가 상경, 서울 종로 봉익동에 정착하였다. 다음 해 아버지를 따라 경상북도 영해읍으로 갔으며, 1888년 평양으로 갔다.
1892년 응제진사시(應製進士試)에 합격하였다. 다음 해 아버지를 따라 원산으로 가서 육영사업에 조력하였다. 1896년 독립협회에 가담, 개화 민권의 기수로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다음 해 독립협회 주최로 서울 종로 네거리에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가 열렸을 때 잘못된 정치를 탄핵하고 상소하며 국민운동 일선에 나섰다. 이로 인해 이준(李儁)·이승만(李承晩)과 함께 옥고를 치렀다.
1898년 7개월 간의 옥고를 치르고 출옥한 뒤 이종일(李鍾一)이 창간해 경영하는 『제국신문(帝國新聞)』에 사설을 집필하면서, 이종일의 가르침을 받아서 본격적으로 민족의식과 사상 정립을 위해 수련하였다. 『제국신문』 논설위원으로 개화 논설 수십 편을 집필하였다.
1903년 이상재(李商在)·전덕기(全德基)목사 등 종교인과 손잡고 YMCA운동을 전개하였다. 1904년 한일협약이 강제 체결되자 서울 상동교회(尙洞敎會)에서 전덕기·양기탁(梁起鐸)·신채호(申采浩)·조성환(曺成煥) 등과 같이 청년회를 조직해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면서 김구(金九)·이회영(李會榮) 등과 교유하기 시작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일제의 강압으로 체결되자 동지들과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이 조약이 체결된 덕수궁 대한문(大漢門)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이면서 조약의 무효와 파기를 선언했다가 일본 헌병에 잡혀 2개월 간 고문을 받았다.
1906년 만주 북간도 용정촌(龍井村)으로 망명, 이상설(李相卨)·여준(呂準) 등과 같이 서전평야에 서전의숙(瑞甸義塾)을 설립, 한국 동포와 2세의 민족 교육을 본격적으로 실시해 독립운동의 기수들을 길러냈다.
1907년 이준·이상설·이위종(李瑋鍾)이 헤이그특사로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 가자 귀국하였다. 귀국 후 안창호(安昌浩)·전덕기·양기탁·이동휘(李東輝)·이갑(李甲)·노백린(盧伯麟)·유동열(柳東說) 등과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였다.
또 안창호·이회영과 협력해, 전국에 교육단을 조직하고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발행을 지원하였다. 대성학교(大成學校)와 오산학교(五山學校) 설립에도 조력했으며, 상동학교(尙洞學校)를 설립·교사로 재직하기도 하였다.
1910년 나라를 일제에 빼앗긴 뒤 만주 서간도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망명하였다. 이석영(李石榮)·이철영(李哲榮)·이회영·이시영(李始榮)·이상룡(李相龍) 등과 함께 한국인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해 교포들의 신분 보장과 독립정신 고취에 앞장섰다.
곧이어 신흥학교(新興學校)를 설립하고 초대 소장으로 취임하였다. 이 학교는 1919년 신흥무관학교로 확장, 개편되어 항일독립군 양성의 중추기관이 되었다. 1913년 노령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났으며,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2년 뒤 이상설의 알선으로 시베리아총독 보스타빈이 약속한 한국군관학교(韓國軍官學校) 설립을 추진하다가 발각되어 3개월 간 투옥되었다. 1911년 독립운동가의 사업기관으로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는 데 참여하여 『권업신문(勸業新聞)』을 발행·보급하였다. 1914년 이상설·이동휘 등과 함께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하였다.
1918년 길림성(吉林省)에서 대종교 김교헌(金敎獻) 외에 조소앙(趙素昻)·조완구(趙琬九)·김좌진(金佐鎭)·여준 등 민족 대표 39명이 「대한독립선언서」(이칭: 「무오독립선언서」)를 작성할 때 참여하여 연서하였다. 1919년 2월 1일 「대한독립선언서」를 내외에 선포할 때 대종교 서도본사(西道本司)의 포교책으로 활약하였다.
그 해 2월 블라디보스토크와 니콜리스크에서 상해로 건너가 정부 조직을 모색하였다.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4월 13일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의 초대 의장으로 선임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탄생을 주선하였다. 4월 13일 28명의 동지들과 임시정부 수립을 내외에 선포하고 얼마 뒤 국무총리로 취임하였다.
그 해 9월 국내·노령·중국 3갈래의 임시정부가 통합되고, 헌법이 대통령 중심제로 바뀌면서 내무총장(內務總長)이 되었다. 1921년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서 돌아와 국무총리로 지명하자 사양하다가, 이동휘 일파가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사퇴한 뒤 국무총리대리를 맡아 위기를 극복하였다.
그 뒤 국민대표회(國民代表會)의 소집 등 대한민국임시정부 불신이 표면화되었다. 이에 이동녕은 안창호·여운형·조소앙·이시영·차이석(車利錫)·홍진(洪震)·노백린(盧伯麟) 등과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 대동단결을 호소하였다.
전장(鎭江)에서 요양 중 상해로 와서 1924년 국무총리로 정식 취임했고, 군무총장(軍務總長)도 겸임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장기 궐석으로 직무수행이 어렵게 되자 대통령 직권을 대행하였다.
1925년에 두 번째로 의정원의장[11대]이 되었다. 1926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헌법이 대통령 중심제에서 국무령 제도로 개정되자 잠시 국무령(國務領)이 되었으며, 법무총장도 겸임하였다. 다음 해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主席)이 되어 약화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튼튼한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1930년 김구 등과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조직, 이사장에 추대되었고, 당기관지 『한보(韓報)』·『한성(韓聲)』을 발행하였다. 1929년 10월 세번째로 의정원의장[13대]이 되어 존폐의 위기를 극복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1930∼1932)이 되는 중책을 짊어졌다.
1932년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 의거를 김구·이유필(李裕弼) 등과 지도, 윤봉길의 쾌거를 이룩하였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과 같이 저장성[浙江省] 자싱[嘉興] 수륜사창(秀綸紗廠)으로 피신하였다.
1935년 세번째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1935∼1939)이 되었다. 이때 양우조(楊宇朝)·엄항섭(嚴恒燮)·이시영·조성환·차이석·송병조(宋秉祚) 등과 함께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조직해 이사에 선임되었다.
1937년 한국국민당 대표로 대한광복진선(大韓光復陣線)을 결속하고 진로를 모색하였다. 193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네번째 주석(1939∼1940)이 되어 김구와 합심해 전시 내각을 구성, 시안[西安]에 군사특파단을 파견하였다.
그 뒤 급성폐렴으로 쓰촨성[四川省] 치장[綦江]에서 죽었다.
조국광복 후 1948년 사회장으로 봉환식을 거행했고, 효창원에 안장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