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년 감리교(監理敎) 로버트 샤프(Robert A. Sharp)와 한국명이 사애리시(史愛理施)였던 그의 부인 앨리스 샤프(Alice Sharp)가 공주읍 중동 318번지 현 기독교 사회관 자리에 학교를 열어 수명의 남녀 학생을 모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영명학교의 출발이 되었다.
1906년 10월 15일에 현 영명중 · 고등학교(永明中 · 高等學校) 구관(舊官) 터에서 정식 학교 이름을 걸고 개교하였으나 학생 모으기가 쉽지 않아 수업료 면제는 물론이거니와 교과서 학용품의 무료제공, 용돈제공이라는 특전을 베풀었으나 학생 확보에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영명학교 제3회 졸업생 윤창석(尹昌錫)은 3·1운동의 한 계기가 된 동경(東京) 유학생 대표로서 2·8 독립선언을 주도하는 역할을 다하였다. 3·1운동 때는 교사 김관희의 지도 밑에 김수철 · 유준석(유관순의 오빠) 등이 주동이 되어 공주 공설시장으로 뛰쳐나가 독립만세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12년 파송된 윌리엄 린튼 선교사의 부인 샬롯 선교사는 유관순(柳寬順)을 발탁하여 영명학교에서 잠시 교육시키다가 다시 이화학당(梨花學堂)으로 보낸 연고를 갖고 있다. 1921년 현 영명중 · 고교의 구관건물이 완성되는 등 차츰 학교가 발전의 궤도에 올랐으나, 1930년 중기에 접어 들면서 일제의 기독교계 학교 탄압이 점차 가혹해져 그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었다.
1940년 12월 총독부 당국은 울리암 교장의 강제출국을 명하여 귀국하게 되었고, 이후 신사참배 거부 등으로 취해진 일련의 조치에 따라 영명학교도 1941년 7월 30일 강제폐교를 당하였다.
대개 이렇게 폐교된 학교들이 8·15 광복 후 거의 다시 문을 열었으나, 동교의 경우 1949년 9월 28일에 가서야 동교 졸업생인 전 충청남도 지사(知事) 황인식을 2대 교장으로 영입해서 재출발하였다.
강제폐교 당시까지 1천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며 그 중에는 정치가 조병옥(趙炳玉), 소설가 방인근(方仁根) 등 인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