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형무소 ()

근대사
제도
대한제국기에 조선통감부가 서울 현저동에 설치한 감옥.
이칭
이칭
경성감옥, 서대문감옥, 경성형무소, 서울형무소, 서울교도소, 서울구치소
정의
대한제국기에 조선통감부가 서울 현저동에 설치한 감옥.
개설

1908년 조선통감부가 의병 등 반일세력을 탄압·수용할 목적으로 만든 감옥이다. 건물은 본래 아연판을 붙인 판자로 두른 허술한 형태였다. 건립비용은 약 5만원이었고, 규모는 청사 및 부속건물 80평, 감방 및 부속건물 480평이었다. 원래 수용인원은 500여 명이었는데, 이후 증·개축을 반복하여 1938년 현재 수용인원은 2,763명이었다.1988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

변천과 현황

조선시대에 죄수의 수감을 관장했던 부서는 형조 산하의 전옥서(典獄署)였다. 전옥서는 주로 형벌을 확정하고 집행하기 전까지 미결수(未決囚)를 수감하는 시설로 제한적으로 운용되었다. 1895년 정부는 전옥서를 폐지하고 내부(內部) 경무청 산하에 감옥서(監獄署)를 두어 감옥 사무를 관장했다. 현재 감옥서의 「부지평면도」가 남아 있다.

그런데 1905년 을사늑약과 1906년조선통감부 설치로 인해 정부의 법집행의 자율성이 일제에 의해 크게 침해되고, 1907년 일본인이 감옥 관리 인력으로 대거 기용됨에 따라 감옥 운영의 주도권은 일제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어 1908년(순종 2) 10월 21일 일본인 건축가 시텐노 가즈마〔四天王要馬〕의 설계에 의해 경성감옥(京城監獄)이 건립되었다. 이 감옥은 본래 1907년 8월에 완성되었으나 군대 해산 이후 해산 군인의 의병 가담과 순종황제 등극 이후 시국의 불안정 등으로 인해 바로 개소되지 못했다가 1908년 10월에야 비로소 개소하게 되었다.

그러나 1912년경성감옥이 마포 공덕동에 신축 옥사로 이전함에 따라, 현저동에 있던 기존의 감옥시설은 ‘서대문감옥’으로 불리게 되었다. 서대문감옥 산하에는 종로출장서(옛 전옥서), 대평동 출장소 및 영등포·인천·춘천분감을 두었다. 1923년 ‘서대문형무소’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이로부터 오늘날 일반인에게 익히 알려진 ‘서대문형무소’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현재 1930년에 작성된 「서대문형무소 배치도」가 남아 있다.

해방 후에는 1946년 ‘경성형무소’, 1950년 ‘서울형무소’로 불렸다. 1961년 행형법(行刑法) 개정에 따라 ‘서울교도소’가 되었고, 1967년부터 1987년까지는 ‘서울구치소’로 불렸다. 현재 서울구치소는 경기도 의왕시에 위치해 있다. 1987년서울특별시는 이곳을 독립운동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사적(史蹟)으로 지정하고 서대문 독립공원을 조성했다. 1998년에는 체계적인 전시와 홍보를 위해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개관했다.

내용

경성감옥은 1906년 경무고문이었던 마루야마 시게토시〔丸山重俊〕가 한국 내 감옥의 수용능력 부족을 지적하면서 신축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1908년 10월 일본인 시텐노 가즈마〔四王天數馬〕의 설계에 따라 500여 명의 수용인원 규모로 건립되었다. 감옥이 설립된 이후 초기에는 허위(許蔿, 1854∼1908), 이강년(李康秊, 1858∼1908), 이인영(李麟榮, 1867∼1909) 등 후기의병의 주도자들이 많이 투옥되었다. 허위 등은 모두 경성감옥에서 사형으로 순국하였다. 1908년 10월 현재 수감자 2,019명 중 내란죄는 192명, 폭동죄 44명, 강도죄 710명, 절도죄 314명, 준강도가 134명 등이었다. 일제는 1908년 경성감옥 이외에도 공주, 함흥, 평양, 해주, 대구, 진주, 광주 등 전국 7개 주요 지역에 본감옥(本監獄)을 세웠다.

1919년에는 3·1운동으로 인해 수감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당시 시위관련자 1,600여 명을 포함해 3,000여 명이 수용되었다. 특히 한용운(韓龍雲, 1879∼1944), 유관순(柳寬順, 1902∼1920) 등이 독립선언과 독립만세운동으로 인해 이곳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밖에도 일제강점기에 양한묵·강우규·안창호·여운형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된 곳이었다.

일제는 표면적으로는 재소자에 대해 정해진 작업, 정량의 식료품 배급, 교육과 운동에 대한 교정 규정을 가졌다. 그러나 실제로 형무소에 투옥된 독립운동가에게는 형기가 확정되기 전부터 온갖 취조와 고문이 자행되었다. 또한 옥사 내에는 겨울철에 난방이 되지 않아 동상을 입는 경우가 다반사였으며 동사(凍死)하는 일도 빈번했다. 여름철에는 각종 전염병으로 병사자가 속출하는 등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처우가 가혹하였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정치·사회문제로 관련하여 간첩 및 사상범이 많이 투옥되었다. 특히 운동권학생과 재야인사 등이 투옥되어 민주화운동의 성지(聖地)로 이해되기도 한다. 함석헌(咸錫憲)·유달영(柳達永) 등도 이곳에서 옥고를 치렀다.

의의와 평가

항일독립운동사의 수난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다. 일제가 대한제국기∼일제강점기에 활동한 항일독립운동가들을 체계적으로 탄압하기 위해 만든 공간이었다.

참고문헌

『서대문형무소 100년, 그 기록과 역사』(서대문형무소 역사관, 2008)
『서대문형무소 근현대사』(김삼웅, 나남, 2000)
「대한제국 말기 일제의 경성감옥 설치와 본감·분감제 시행」(박경목, 『한국근현대사연구』46, 2008)
「일제하 서대문형무소 연구」(양성숙, 성신여대 박사학위논문, 2006)
집필자
서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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