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조선총독부가 친일(유림)인사들을 동원해 만든 관변 유림단체이다. 명목상 유림단체를 표방했지만, 회원 자격은 유림뿐만 아니라 ‘성년 이상의 제국 신민(臣民)으로써 본 회의 취지에 찬동하는 자’로 규정하였다. 본부를 경학원(經學院) 내에 두고, 도(道)에 도연합회(道聯合會), 부(府) · 군(郡) · 도(島)에 지부를 설치했다. 집회는 주로 향교의 명륜당과 학교시설을 이용하였고, 경비는 향교재산에서 충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1942년 기관지 『유도(儒道)』를 창간하여 1944년까지 제7호를 간행했다. 1939년 창립 당시의 임원을 살펴보면, 총재는 정무총감 오노 로쿠이치로〔大野綠一郞〕, 회장은 경학원 대제학 윤덕영(尹德榮), 고문은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총재 가와시마 요시유키〔川島義之〕 및 전 총독부 학무국장이며 중앙협화회 이사장 세키야 테자부로〔關屋貞三郞〕 등이었다.
전시체제에 유림의 인적, 물적 자원을 총동원할 목적으로 설립했다. 창립선언문에 따르면 조선유도연합회의 설립목적은, 첫째, 경학원을 중심으로 한 전 유림의 단체를 조직하고 ‘황도정신(皇道精神)’에 입각한 유교의 진흥을 꾀하며, 둘째, ‘국민정신총동원(國民精神總動員)’의 취지에 따라 충효(忠孝), 도의(道義)의 신념을 널리 고양하고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서 굳게 단결시키며, 셋째, 동아시아에 새로운 질서를 수립한다는 국가적 목표에 따라 동양 문화의 진수를 널리 알리고 이로써 일본 · 만주 · 중국을 연결하는 영구평화의 정신적 연계를 만든다는 것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는 한국 유림 및 유교를 식민지체제에 맞추어 변용하기 위해 전국적인 유림단체의 결성을 대폭 지원하였다. 그 결과 1932년조선유교회(朝鮮儒敎會)가 창립되었다. 그러나 조선유교회는 1936년부터 유명무실한 상태가 되었다. 이런 상태에서 1935년평양에서 전조선유림대회(全朝鮮儒林大會)가 개최되어 경성에 유림총연합회(儒林總聯合會)를 설치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한편 1939년 10월 16일 경성에서는 경학원(經學院) 주최로 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 조선군사령관 나카무라 고타로〔中村孝太郞〕, 학무과장 시오바라 도키사부로〔鹽原時三郞〕,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총재 가와시마 요시유키, 자작 윤덕영 등이 내빈으로 참석한 가운데 국내 각지 대표 300명이 전선유림대회(全鮮儒林大會)를 열고 경학원을 중심으로 ‘황도정신’에 기초한 유도(儒道)의 진흥을 목적으로 한 조선유도연합회(朝鮮儒道聯合會)를 설립할 것을 결의하였다.
조선유도연합회의 조직구성은 조선총독부의 행정적 지원 아래 일사분란하게 이루어졌다. 조선총독부는 정무총감 명의로 도지사에게 빠른 시간 내에 도연합회를 결성할 것을 촉구하였고, 학무국도 임시 도지사회의에서 도연합회의 결성을 재촉하였다. 그 결과 1939년 11월∼1941년 3월 충북 유도연합회의 결성을 시작으로 전남, 경기, 충남, 전북, 평북, 평남, 함북, 함남, 경북, 경남, 황해, 강원 등 13개도에서 도지사의 지원 아래 도(道) 단위 유도연합회가 조직되었다. 이렇게 결성된 지방 유도연합회의 회장에는 도지사가 추대되었다.
조선유도연합회에서 내건 주요 사업은 경학원과 명륜전문학원(明倫專門學院)을 통해 유교를 진흥시키고, 조선유도연합회와 각종 유림단체를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에 가입시키며, ‘전조선유림대회’를 통해 ‘황도(皇道)정신’에 기초하여 유교의 진흥을 도모하고, 향교를 통해 지방 청년단(靑年團)의 사업을 원조케 하며, 유림에게 ‘정신총동원’의 취지를 철저히 주지시키는 일 등이었다.
이런 사업목표에 따라 조선유도연합회의 간부들은 지방을 돌면서 시국강연과 강습회를 자주 열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경학원 사성이자 조선유도연합회 편찬부장 이경식, 경학원 사성이자 조선유도연합회 교육부장 안인식, 조선유도연합회 상임이사 이명세 등이었다.
1942년에는 기관지인 『유도(儒道)』를 창간하여 1944년까지 제7호를 간행했다. 집필진은 대개 친일유림, 일본인 관료 및 관학자들이었는데, 그 내용은 경학원의 기관지인 『경학원잡지(經學院雜誌)』와 대동소이하여 ‘황도유학(皇道儒學)’을 선전하고 일제의 침략 전쟁을 옹호하는 내용이었다.
조선총독부의 직접적인 지원도 있었지만 지방유림의 주요 재원인 향교재산을 본 단체의 재원으로 규정함으로써 지방유림의 분열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밖에도 조선유도연합회는 성지참배단(聖地參拜團)을 만들어 일본의 ‘성지(聖地)’를 참배하고, 각도 유림의 모금을 강요하여 10만 3천원 상당의 군용기인 일명 ‘유림호(儒林號)’를 기부했다.
1940년대의 대표적인 관변 유림단체이다. 또한 전시체제기에 결성된 최대 규모의 유림단체로서, 일제가 전통사상과 전통지식인을 어떻게 변질시켜 전시총동원체제에 동원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명목상 유림단체를 표방했지만, 본부를 경학원 내에 설치하고 회장에 경학원 대제학을 추대하였으며, 지방의 유도연합회 회장에 도지사가 임명된 사실에서 보이는 것처럼 실제로는 조선총독부가 운영한 관변 유림단체였다. 즉 일제의 침략전쟁을 뒷받침하기 위해 식민지 한국의 인적, 물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수탈하기 위한 이데올로기 단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