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장단 출신으로, 호는 완운(蜿雲), 이명은 윤중규(尹仲珪)이다.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한동안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 교사로 재직했다. 1908년 안창호(安昌浩) 등과 청년학우회를 조직해 활동하다가 중국 만주로 망명한 후 신흥무관학교 교사 · 교장으로 10여 년간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1912년 부민단(扶民團)에 가입하고,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요청에 따라 부민단 대표로 임시정부에 파견되었다. 1920년 육군무관학교 교관, 상해거류민단 위원 등을 지냈고, 1921년 5월 중한국민호조사(中韓國民互助社) 결성에 참여했다. 같은 해 11월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 25명과 함께 태평양회의의 각국 대표에게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서한을 제출했다.
1923년 임시의정원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지지했고, 1924년 2월 임시의정원 의장에 선출되었으며, 1926∼1932년 임시정부 국무원(군무장), 1927년 개헌안 기초위원을 지냈다. 이 과정에서 1924년 군사교육서인 『보병조전(步兵操典)』을 저술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민족유일당운동에 동참하여 1929년 신익희(申翼熙) 등과 한국혁명당, 1930년 임시정부를 비롯한 민족주의계열 인사들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다.
1932년 10월 12일 한국혁명당 대표로 민족운동단체 통합을 추진해 각단체연합주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10월 23일 열린 회의에서 연합체 명칭을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으로 결의하였고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35년 7월 민족혁명당 창당에 참여했다. 이어 1936년 민족혁명당 당보부책임자, 1943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차장을 지내는 등 대한민국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의 법무 · 군사 · 교육부문 요직을 두루 거쳤다.
해방이 되자 1946년 2월 귀국하여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으로 당기관지인 『앞길』의 사장이 되었고, 같은 달 좌익세력의 연합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부의장 및 상임위원을 지냈다. 1946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조선민족혁명당 대표로 관선의원에 선출되어 부의장을 지냈고, 1948년 국학대학 학장을 지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고, 1956년 7월 안재홍(安在鴻) 등 납북인사를 중심으로 결성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1959년 반혁명분자혐의로 구속되어 숙청되었다.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