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후반의 국외 독립운동은 국민대표회와 민족유일당운동의 실패로 침체 상태에 놓였다. 그러나 만주사변과 상해사변 이후 독립운동이 다시 활기를 찾게 되어 독립운동단체들의 통일 방안이 모색되었다.
그 결과 김규식(金奎植)은 광복동지회(光復同志會) 대표로서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의 최동오(崔東旿), 의열단(義烈團)의 한일래(韓一來),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이유필(李裕弼) · 김두봉(金枓奉)과 협의하여 1932년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을 결성하였다.
이 ‘동맹’은 보다 효과적인 항일 투쟁을 위해 1935년 7월 5일 한국독립당 · 의열단 ·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 · 조선혁명당 · 미주대한인독립당(美洲大韓人獨立黨) 등 5당 대표가 난징[南京]에서 민족혁명당을 결성함으로써 대당(大黨) 조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민족혁명당은 편의에 따라 당명 앞에 ‘한국’ · ‘조선’ · ‘고려’의 명칭을 붙여 사용했는데, 초기에는 주로 ‘한국’을 사용했으나 1937년 이후 ‘조선’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민족혁명당이 결성될 당시 임시정부 옹호를 주장하던 한국독립당계 일부 인사들이 불참하였으나, 거의 모든 독립운동정당 · 단체 들을 망라함으로써 민족연합전선적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김원봉(金元鳳)이 이끄는 의열단계가 당권을 장악함으로써 이에 불만을 느낀 조소앙(趙素昻)의 한국독립당계가 1935년 9월 하순 이탈하고, 1937년 3월 지청천(池靑天)계도 이탈하여 4월 조선혁명당을 결성함으로써 민족대당(民族大黨)으로서의 성격을 어느 정도 상실하게 되었다.
민족혁명당이 채택한 강령의 주요 내용은 일제는 물론 봉건 세력과 반혁명 세력을 투쟁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정치적으로는 보통선거제와 자유권 보장 등 민주주의를 내세우고 있고, 사회 · 경제적으로는 토지국유제, 대생산기관 및 독점 기업의 국영화, 사회보장제도의 실시 등을 주장하고 있었다.
민족혁명당은 1937년 12월 조선민족해방자동맹 · 조선혁명자연맹 등을 규합하여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였으며, 1938년 10월 10일 그 산하 군사조직으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를 조직해 중국 각지에서 활발한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민족혁명당은 결성 이후 줄곧 임시정부에 참여하지 않았으나, 중일전쟁 이후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 정당 · 단체 들이 연합전선을 형성하자, 1941년 11월에 개최된 제6회 전당대표대회 결의에 따라 임시정부에 참여, 광복 직후까지 활동하였다. 민주주의민족전선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그 해 6월 인민공화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한편, 조선민족전선연맹의 군사조직인 조선의용대는 1942년 5월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