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9월 “일본 제국주의를 박멸하여 한국의 절대 독립을 이룬다.” 는 강령하에 국민부(國民府)의 정당적 성격을 갖춘 자매기관으로 길림성(吉林省)에서 결성되었다. 1927∼1929년 사이에 유일당촉성론(唯一黨促成論)이 논의되어 대집회를 개최하였으나 실패, 만주 일부만의 조직체를 결성한 것이다.
출범 당시에는 현익철(玄益哲, 중앙책임비서) · 현정경(玄正卿, 정치) · 이웅(李雄, 군사) · 고이허(高而虛, 조직) · 최동오(崔東旿, 외교) · 장승언(張承彦, 재무) · 김보안(金輔安, 교육) · 고할신[高轄信, 일명: 고활신(高豁信), 선전] 등이 간부로 활약하였다. 성당부(省黨部) · 현당부(縣黨部) 등 100여 지부당에 정원 3,500명, 준당원 2,000명을 두고 있었다.
한편, 조선혁명당은 그 산하에 조선혁명군을 두었다. 조선혁명군은 당의 이념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하여 1929년 12월 20일 기존 조직을 크게 개편하였다. 이 개편을 통해 조선혁명군은 총사령에 이진탁(李辰卓), 부사령에 양세봉(梁世奉), 참모장에 이웅을 임명하고 기존 10개 대(隊)를 7개 대로 편성하였다. 1931년 9월의 만주사변 이후 만주를 벗어나 국내로 남하, 1932년 11월에는 대일전선통일동맹(對日戰線統一同盟) 결성에 가담하였다.
그 뒤 1935년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에 합병되었다가 이탈, 1937년 4월 난징[南京]에서 재건되었다. 이때 중앙위원은 지청천(池靑天) · 최동오 · 유동열(柳東說) · 이광제(李光濟) · 박창세(朴昌世) · 양기탁(梁起鐸) · 현익철 · 김학규(金學奎) · 이운환(李雲煥) · 강창제(姜昌濟) 등이었다.
그 해 8월 김구(金九)의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이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구성할 때 이 연합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이 당은 비록 ‘연아용공(聯俄容共)’을 주장하고 한국국민당과 함께 단일 정당을 추구하였으나 시종 전통 있는 이론을 수립하지는 못하였다.
특히 당내에 청년이 극히 소수이고 대부분 중년 간부로 구성되어 있어 적극적인 활동을 보이지 못했다. 또한 조선민족혁명당에서 이탈한 뒤에는 재정이 궁핍하여 한국국민당으로부터 매월 수백 원씩 받아 유지한 점으로 미루어, 경제적으로는 이미 한국국민당에 부속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