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표대회를 소집하기 위한 반응은 다양하였다. 박용만(朴容萬)을 중심으로 한 북경(北京)측은 상해임시정부에 반대했고, 안창호(安昌浩)를 중심으로 한 상해의 국민대표기성회는 상해임시정부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개혁을 요구하는 등 엇갈린 의견이 제시되었다.
그러므로 상해와 북경의 대표자들이 서로 왕래해 조정·타협하여, 1922년 5월 10일 국민대표대회를 추진할 단체로서 이 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주비위원으로 여운형(呂運亨)·이탁(李鐸)·안창호·서병호(徐丙浩)·김병조(金秉祚)·김규식(金奎植)·남형우(南亨祐)·안병조(安秉祚)·최동오(崔東旿)·남공선(南公善)·윤현진(尹顯振)·도인권(都寅權)·김만겸(金萬謙)·신숙(申肅)·김철(金澈)·원세훈(元世勳)·나용균(羅容均)·한진교(韓鎭敎)·이규홍(李圭洪)·이원익(李元益)·강구만(姜九萬) 등을 선임하고, 위원장에 남형우, 회계에 김철·원세훈, 서기에 나용균·서병호를 선출하였다.
결성된 그 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임시정부를 비롯한 각 지역의 독립운동단체가 분열되어 무장운동이 비능률적임을 비판하고, 독립운동을 통일적으로 조직하고자 하였다. 조국광복을 기필코 달성하기 위해서는 독립운동대표가 한자리에 모여 의논해야 한다는 내용의 국민대표대회주비위원회의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주비위원회 공장정(公章程)을 발표해 적극적인 태도로 국민대표대회 소집을 구체화하였다. 동시에 매주 1회의 정기총회와 필요에 따른 임시총회도 소집하기로 하는 등 박차를 가하였다.
또, 『독립신문』 6월 2일자에 대표선출구역 및 단체대표원수를 규정, 발표하고 초청장을 발송하였다. 경비문제로 국민대표대회의 실현이 부진하다가 1923년 1월 3일 국민대표대회가 개최되자 주비위원회는 해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