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통일주비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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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
단체
1921년 중국 북경에서 개최되었던 군사단체의 통일에 관한 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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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21년 중국 북경에서 개최되었던 군사단체의 통일에 관한 협의회.
설립목적

1920년의 청산리·봉오동 독립전투에서 전략적으로는 승리했는데도 불구하고 만주에 있던 10여 개 군사단체의 행동이 일치되지 못해 결과적으로 독립운동단체의 대부분이 시베리아로 강제이동을 당하였다.

이런 이유 등으로 여러 군사단체가 서로 협의하여 통일단체를 구성하려고 하였다.

내용

1920년 9월 초 이회영(李會榮)·신숙(申肅)·박용만(朴容萬)·신채호(申采浩) 등 9명이 군사통일촉성회를 발기했다. 대표로 배달무(裵達武)를 남만주에, 남공선(南公善)을 북만주에 각각 파견하여 각 군사 당국자들과 회합을 준비하였다.

국내 국민회의 박용만, 하와이 국민군의 김천호(金天浩)·박승선(朴承善)·김세사(金世唆), 간도국민회의 김구우(金九禺), 서로군정서의 송호(宋虎), 국내광복단의 권경지(權敬止), 하와이독립단의 권승근(權承根)·김현구(金鉉九)·박건병(朴建秉), 국내청년회의 이장호(李章浩)·이광동(李光東), 대한국민회의 남공선, 국내노동당의 김갑(金甲), 국내통일당의 신숙·신성모(申性模)·황학수(黃學秀) 등 10개 단체의 대표들이 1921년 4월 20일 북경 삼패자(三牌子) 화원에서 군사통일주비회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군사통일방침을 토의한 결과, 러시아에 주둔하는 부대는 국내 공격시에 출동하고, 남만주와 북만주에 산재한 부대는 유격대를 편성하여 국경 방면에서 유격전을 전개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 지휘권을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에 줄 것인지 따로 군사기관을 신설할 것인지를 토의하다가,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비리가 드러나 임시정부를 부인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이 회의의 이름으로 임시정부와 의정원을 불신임하는 결의문을 임시정부로 보내고, 신성모를 대표로 상해에 파견해 정부의 해산을 요구하였다. 다시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하여 군사통일문제를 해결하기로 하고, 국민대표회주비위원으로 박용만·신숙·박건병·남공선·배천탁을 선출했다.

그리고 이를 촉진하기 위해 신채호를 주간으로 주간 『대동(大同)』을 발행하였다. 그러나 이 결의는 재외동포의 격분을 불러일으켰고 임시정부에서는 내무부령으로 각 관서에 경계를 촉구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이 회는 자금문제 해결을 위한 대책을 강구하지 못한 채, 모든 문제를 국민대표회의에 이관하고 정회하였다.

참고문헌

『대한민국임시정부사(大韓民國臨時政府史)』(이현희, 집문당, 1982)
『나의 일생(一生)』(신숙, 일신사, 1963)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조일문, 애국동지원호회,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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