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 만주에 있던 18개 독립운동단체 대표 39명이 모여 유일당 조직 문제를 협의하였으나 완전한 통일을 이루지는 못하고, 우선 전민족유일당조직촉성회(全民族唯一黨組織促成會)와 전민족유일당조직협의회(全民族唯一黨組織協議會)의 두 단체로 통합되었다.
여기서 ‘촉성회’파는 기존 단체를 무시하고 하나로 통합하자고 주장했으나, ‘협의회’파는 기존 단체를 존중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협의회’파의 중심 세력인 정의부는 참의부 · 신민부와의 통합운동을 벌였으나 완전 통합에는 실패하고, 신민부의 민정파(民政派)와 참의부의 일부 세력을 모아 1929년 국민부(國民府)를 조직함으로써 정의부 · 신민부 · 참의부 3부는 해체되었다. 한편, ‘촉성회’파는 참의부와 신민부의 군정파(軍政派) 및 정의부의 촉성회파로 구성되었는데, 그들은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民族唯一黨在滿策進會), 일명 혁신의회(革新議會)를 조직하였다. 이와 같이 만주 지역에서의 민족유일당운동은 혁신의회와 국민부의 두 단체로 통합되었으나 끝까지 완전한 통일은 이루지 못하였다.
한편, 상해에서 개최된 중국 각지의 유일독립당촉성회 연석회의에서는 만주 방면의 연락책임자로 홍진(洪震) · 정원(鄭遠)을 파견하였는데, 이들은 혁신의회와 더불어 군민혁신의회(軍民革新議會)를 조직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와 혁신의회 계통은 김좌진(金佐鎭) 중심의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를 구성했으며, 김좌진이 암살되자 홍진 · 지청천(池靑天) 등이 이 연합회를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으로 개편하였다.
이 단체는 중앙에 6개 위원회를 두고 조직 체계로서 중앙당부 · 지당부 · 구당부의 3단계 조직을 갖추었는데, 동북만(東北滿)의 의병 · 유림 · 대종교(大倧敎) 등의 집단을 망라하였다. 당시 핵심 간부로는 중앙위원장에 홍진, 총무위원장에 신숙(申肅), 조직위원장에 남대관(南大觀), 선전위원장에 안훈(安勳), 군사위원장에 지청천, 경리위원장에 최호(崔灝), 감찰위원장에 이장녕(李章寧)이 선임되었다. 한편, 산하 군사조직으로 한국독립당군을 결성해 총사령에 지청천, 부사령에 황학수(黃學秀)를 임명하였다. 한국독립당군은 동북만주를 중심으로 활약하다 1933년경 활동 무대를 중국 본토로 옮겨 갔다.
1934년 2월 25일 홍진 · 김원식(金元植)이 한국혁명당(韓國革命黨) 대표 윤기섭(尹琦燮) · 연병호(延秉昊) 등과 회합하여 양당 통합에 합의하였다. 1934년 3월 1일에서 8일까지 대표자회의를 통해 당의, 강령을 제정해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을 창당하였다. 한국독립당은 신한독립당으로 발전적 해체를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