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원(昌原). 일명 이국현(李國賢). 자는 필옥(弼玉), 호는 몽호(夢乎). 충청북도 제천 출신.
1898년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참위(參尉)에 임관되었다.
그 뒤 부위(副尉)로 승진되어 육군유년학교(陸軍幼年學校)의 교관이 되었다. 1907년 8월 군대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하자 고향으로 낙향해 동지와 협력, 동명학교(東明學校)를 설립하고 육영사업에 전념하였다.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가 3·1운동 이후에는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원 및 군무부 비서국장으로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이 혼미해지자 1920년 남만주로 건너가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참모장과 중앙집행위원 및 군사부장(軍事部長)을 역임하면서 무장독립투쟁에 헌신하였다.
1922년 통군부(統軍府)가 조직되자 군사부장을 역임하였다. 통군부가 통의부(統義府)로 확대 개편되자 군사위원(또는 참모부장)으로 활동하였다. 통의부에서 내부 갈등이 일어나자 베이징[北京]으로 잠시 옮겨 사태를 관망하였다. 1923년 통의부로 돌아와 군사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23년 한국노병회에 입회하여 특별회원이 되었다. 1927년 만주로 가 신민부(新民府)에 참여하였다. 김혁 등 간부가 일경에 체포된 뒤, 참모부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중국측과 교섭하여 신민부 관할의 지방자치를 승인받는 데 일조하였다. 1928년 3부 통합을 위한 회의에 신민부 대표 가운데 한 명으로 참여하였다. 혁신의회가 조직되자 참여하였다. 1930년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에 참여하였으며 한국독립군을 조직하는 데 일조하였다. 1932년 한국독립군 부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후 남경으로 이동하여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에 참가하였다.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창당할 때 참여하였으며 1938년 7월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사위원에 취임했다가 1939년에 임시의정원 의원에 재선되었다.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도 겸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사특파원으로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에 주둔 중 1941년 광복군사령부가 시안에 설치됨으로써 광복군특별당부 집행위원장으로 활약하였다.
그 뒤 충칭[重慶]에 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이 되었으며 생계부장(生計部長)으로 활동하다가 1945년 광복을 맞아 귀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