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이장영(李長榮). 호는 백우(白于). 충청남도 천안 출신이다.
한국무관학교(韓國武官學校) 3기생으로 졸업하여 1903년(광무 7) 대한제국의 육군참위가 되었고, 이후 부위(副尉)가 되었다.
1907년 한국군대가 강제해산되자 황실친위대(皇室親衛隊)에 입대하라는 특명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가재를 정리하여 가족을 거느리고 망명하여 1908년 만주 봉천성(奉天省)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도착하였다.
그 뒤 국내에서 이상룡(李相龍)·이동녕(李東寧)·이철영(李哲榮)·이회영(李會榮)·이시영(李始榮) 등과 윤기섭(尹琦燮)·김동삼(金東三)·김창환(金昌煥)·주진수(朱鎭洙)·이광(李光) 등이 건너오자, 서로 힘을 합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황무지를 개척하였다. 한편, 신흥학교(新興學校)가 설립되자 교관으로 취임하여 독립군의 기간요원을 양성하였다.
1919년 대종교(大倧敎)의 지도자 서일(徐一)을 중심으로 한 중광단(重光團)의 인사들이 애국지사들을 포섭하여 정의단(正義團)을 결성하고 임전체제의 군정부(軍政府)를 조직하자, 이에 가담하여 참모장으로 활약하였다.
체코군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하여 무장하고, 그해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휘하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칭하여 각처에 경찰사무와 정보연락을 담당하는 부서를 두고 활동하였다. 한편, 사관양성소(士官養成所)가 설립되자 교관이 되어 이범석(李範奭)·김규식(金奎植)·김홍국(金洪國)·최상훈(崔尙勳)과 함께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1920년 청산리전투를 치른 뒤 북로군정서·대한독립군·간도대한국민회·대한신민회·도독부(都督府)·의군부(義軍府)·혈성단(血誠團)·야단(野團)·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 등 여러 단체의 지도자들이 밀산(密山)에 모였다.
이곳에서 그들은 모든 단체를 통합하여 군대를 개편하고, 노령(露領)으로 가서 무기를 보충하여 항일투쟁을 강화할 것을 협의하였다. 그래서 총 병력 3,500명의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고 참모총장으로 총재 서일, 부총재 홍범도(洪範圖) 등과 함께 대일 무력항쟁을 계속하였다.
1922년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조직되자 참모로 활약하였다. 1924년 3월 현천묵(玄天默)·나중소(羅仲昭) 등이 대한독립군정서를 조직하자 조성환(曺成煥)·김규식 등과 함께 참모로 활약하였다.
그해 7월 길림(吉林)에서 전만통일의회주비회(全滿統一議會籌備會)가 열렸을 때 윤각(尹覺)과 함께 대한독립군[대한독립군정서로 추정] 대표로 참가하여 군사분과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옹호해야한다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주비회에서 탈퇴하였다.
한편, 의성단의 일원으로 활동했으며 정의부로 통합되자 탈퇴하였다. 1925년 북로군정서 출신들이 중심이 되어 신민부가 조직되자 참의원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30년 7월 홍진(洪震)·지청천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감찰위원장에 임명되었으며, 한중연합군을 조직하여 무장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일제의 만주침략으로 북경(北京)으로 옮기다가 1932년 일제의 사주를 받은 마적에게 가족과 함께 피살되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