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청천 ()

지청천
지청천
정치
인물
일제강점기 때, 한국독립당 군사위원장,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등을 역임한 군인 · 정치인 · 독립운동가.
이칭
백산(白山)
이칭
이청천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88년(고종 25) 1월 25일
사망 연도
1957년 1월 15일
본관
충주(忠州)
출생지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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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일제강점기 때, 한국독립당 군사위원장,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한국광복군 총사령관 등을 역임한 군인 · 정치인 · 독립운동가.
개설

호는 백산(白山). 본명은 대형(大亨), 일명 이청천(李靑天). 서울 출신.

생애 및 활동사항

한말 무관학교(武官學校)에 입교, 2학년 때 1, 2년생 40여 명과 함께 정부유학생으로 일본 육군중앙유년학교(陸軍中央幼年學校)에 들어갔다.

이 때는 본명인 지대형을 사용하였다. 유년학교는 뒤에 일본사관학교 예과가 된 3년제이며, 다시 본과 2년이 있는데, 유학 도중 한일합병이 되어 본과에 편입되었다.

제26기생으로 1913년 졸업, 중위가 되면서 1919년 만주로 망명하여 대일무력항쟁을 지도하기 위해 일본의 병서와 군용지도를 가지고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찾았다.

독립군 간부양성에 진력하고 1920년 상해임시정부 산하의 만주군정부(滿洲軍政府) ·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간부가 되었다. 같은 해 10월 일본이 혼춘사건(琿春事件)을 조작하고 청산리싸움에서 대패하자, 일본군은 무차별 살육을 감행하였다.

이에 서로군정서를 이끌고 간도성(間島省) 안도현(安圖縣) 밀림으로 이동, 서일(徐一) · 김좌진(金佐鎭) 등과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고 군단의 군사고문이 되었는데, 이때 이청천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1921년 6월 소련혁명군과의 마찰로 흑하사변[黑河事變, 자유시사변]이 발발하자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여 고려혁명군을 1개 여단으로 재편하는 데 참여하였다. 같은 해 10월 여단 내에 설치한 고려혁명군관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1922년 4월경 군관학교 교육방침과 소련 당국의 규정이 대립되어 체포되었으나 7월 임시정부의 노력으로 석방되었다.

1923년 1월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자 고려혁명군 대표로 참가했고, 1924년 국민위원회를 구성하고 군사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했다.

항일 독립군의 재건과 통합 운동이 계기가 되어 북만주에는 신민부(新民府) · 대한의용군사회(大韓義勇軍事會)가 생기게 되고, 남만주에는 대한국민단(大韓國民團)이 조직되었고 서로군정서가 모태가 되어 대한통군부(大韓統軍部)가 조직되었다.

그 뒤 양기탁(梁起鐸) · 오동진(吳東振) 등과 함께 대한통군부를 대한통의부로 개편하였고 다시 정의부로 확대 조직, 군사위원장 겸 사령장이 되었다.

김좌진이 저격당한 뒤, 1930년 7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창당에 참여, 군사위원장이 되었으며, 별도로 한국독립군을 만들어 총사령관이 되었다.

1932년에는 동아혈성동맹(東亞血成同盟)의 간부로서 각지의 항일단체를 규합하는 데 힘썼다. 1933년 치치하얼[齊齊哈爾]에 잠입하여 항일지하운동을 지휘하면서 한중연합군의 총참모장이 되었으나, 중국 공산당의 압력으로 무장해제 당한 뒤, 같은 해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 한국인 특별반을 만들어 책임자로 활약하였다.

1940년 9월 17일 임시정부가 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하자 사령관이 되어 1945년 환국할 때까지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환국 후 26개 청년단체를 통합한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을 창설하여 단장이 되었다.

제헌국회의원과 초대 무임소 장관을 역임하고 제2대 국회의원, 민주국민당의 최고위원을 지냈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기려수필(騎驢隨筆)』
『한국광복군 총사령 지청천』(이현주, 역사공간, 2010)
『독립유공자공훈록』5(국가보훈처, 1988)
『한국독립운동지혈사』(박은식, 진신사, 1920)
관련 미디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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