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화 / 홍화랑
무궁화 / 홍화랑
식물
개념
속씨식물의 유성생식기관.
정의
속씨식물의 유성생식기관.
개설

형태와 색채가 매우 다양하여 각각 그 특징이 있으며, 구조상으로는 필수기관인 꽃술과 보조기관인 화피(花被)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꽃술은 수술과 암술이 있는데 이를 모두 가진 것을 양성화(兩性花), 하나만 가진 것을 단성화(單性花)라 한다.

화피는 꽃의 내부를 보호하고, 한편 벌이나 나비를 꾀는 것으로 꽃받침과 꽃부리로 구분된다. 대부분 화밀(花蜜)·화분(花粉)·방향(芳香)이 있다. 그리고 꽃은 수분방법(受粉方法)에 따라 충매화(蟲媒花)·풍매화(風媒花) 등으로 나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관상가치가 있어 아름다움과 정서적 위안을 주는 식물을 말하기도 한다. 양치식물의 포자수(胞子穗), 소철의 화수(花穗) 또는 기타 나자식물(裸子植物)의 화수도 원시형의 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은 목련이나 진달래같이 화려한 것만을 꽃이라고 하며, 버드나무나 참나무류와 같이 화려한 색깔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꽃인 줄 모르고 있다.

지구상에 있는 식물의 종(種)은 30만 종 내외로 보고 있으며, 꽃으로 취급되는 종은 약 8천여 종이라고 보지만 온실화훼까지 합치면 수만 종에 이른다. 또한, 한 종당 품종 수가 매우 많아 장미 한 종에서 발표된 품종 수만 해도 1만5000여 종류가 된다.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자생식물은 170과 897속 2,898종 7아종 929변종 301품종 등 4,135종류가 있으며, 이 가운데 꽃으로 이용할 가치가 있는 것은 약 500여 종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생종 이외에도 많은 외국품종이 도입되었으며, 특히 1982년 화훼류의 수입개방으로 최근에는 한 달 전에 발표된 외국의 신품종이 국내에서 양산될 정도이다.

꽃은 개화시기에 따라서 봄꽃·여름꽃·가을꽃·겨울꽃, 재식시기에 따라서 춘식(春植)·추식(秋植), 이용면에 따라서 꽃꽂이용·화분용·화단용·정원수로 나눈다.

그리고 재배장소에 따라서 노지꽃·온실꽃, 원산지에 따라서 열대·한대·온대 등으로 분류하며, 원예학적으로는 재배특성과 이용면을 고려하여 일년초·숙근초(宿根草)·구근류·화목류·관엽식물·식충식물·다육식물·수생식물·고산식물 등으로 분류한다.

나라 꽃은 무궁화이지만 각 지방의 지역적인 향토를 상징하는 꽃도 각 시군마다 제정해 놓고 있다. 1960년대 후반부터 향토 주민들로부터 사랑받는 것으로서 전통·전설·문화·향토 고유의 꽃을 택하여 시나 도를 대표하는 꽃으로 정하였다.

화훼의 역사

우리나라의 꽃 재배에 관한 첫 기록으로 『동사강목』에, 백제 진사왕 때인 390년에 궁실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여러 종류의 꽃을 많이 심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삼국사기』에는 신라 문무왕 때인 674년 경주에 안압지를 만들고 궁정에 꽃을 심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개별 꽃에 관한 기록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백제 때 국화, 신라 때에는 모란을 길렀다는 기록이다. 모란은 632년(신라 선덕여왕 1)에 당나라 태종이 모란을 보내왔으며, 신라 말기에는 최치원(崔致遠)이 각 사찰에 모란을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매화는 41년(고구려 대무신왕 24)에 매화를 길렀다는 사실이 『삼국사기』에 있고, 고려에서는 문종 이전에 재배되었으며 충숙왕 때 중국에서 도입된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세종 때 강희안(姜希顔)이 『양화소록(養花小錄)』에서 그 당시 많은 꽃을 길렀음을 기록하고 있다. 국화는 백제 때 많이 길렀는데, 일본에도 보낸 기록이 있다. 백국(白菊)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중국에서 들여온 황국(黃菊)과 더불어 재배되었다.

고려 때는 내원서(內園署)를 두어 궁궐의 꽃을 관리하게 하였고, 조선시대에도 상림원(上林園)을 두어 궁궐 내의 꽃과 과일을 맡아보게 하였으며, 그 밖에 백성들이 국화 화분을 궁궐에 진상한 기록도 있다.

월계화(月季花:사계화라고도 하며 봄가을에 걸쳐 꽃이 피는 장미 종류)는 8세기경 발해가 중국에서 수입하여 재배하였고, 고려 예종 때도 중국 송나라에서 수입하였다. 작약은 고려 충렬왕 때 원예종이 중국에서 도입되었으며, 동백은 남해안에 자생하여 동백기름을 짜기도 하고 관상용으로 널리 심어졌는데, 이태백(李太白)이 쓴 시에 신라에 동백이 많았다고 쓰여 있다.

무궁화는 중국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에 “한국에는 많은 무궁화[木槿花]가 있는데 아침에 피었다 저녁에 진다(君子之國 有薰華草朝生暮死).”고 하였으며, 다른 기록에는 단군이 개국했을 때부터 무궁화가 많이 재배되었다고 하였다.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에도 우리나라에 무궁화가 많음을 적고 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무궁화가 널리 국민들의 사랑을 받아 재배된 기록이 『화암수록(花菴隨錄)』·『산림경제』·『물보(物譜)』·『양화소록』 등에 남아 있다. 석류와 치자나무는 10세기 전후인 고려 때 도입, 재배되었다.

15, 16세기경 조선시대에 널리 일반화된 꽃으로 『양화소록』에 수록되어 있는 것은 배롱나무·개나리·정향나무·철쭉류·단풍나무·복사꽃·살구꽃·옥매화·해당화·벚나무·혜란·봉선화·해바라기·접시꽃·파초·맨드라미·금잔화·장미·종려·소철·옥잠화·석죽 등이다. 그 뒤 18, 19세기에는 중국에서 백목련과 자목련이 도입, 재배되었다.

따라서, 우리나라 꽃은 자생종과 비슷한 기후에서 자라던 중국의 꽃들이 수입되어 많이 재배되었는데, 고려 중기에서 조선 초기까지 궁정 원예를 비롯하여 귀족과 문인들 간의 재배 및 교류가 있었고, 이는 19세기까지 계속되었다.

조선 말엽 개화기에는 서양의 선교사들에 의한 도입이 있었고, 경술국치 뒤에는 일본에서 많은 꽃이 들어왔다. 한편 미군정시대에는 미국에서도 도입되었다.

꽃에 얽힌 설화

모란과 선덕여왕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선덕여왕의 공주시절의 일화가 전한다. 당나라에서 보내온 모란꽃 그림을 보고 선덕여왕이 “꽃은 비록 고우나 그림에 나비가 없으니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此花絶艶 而圖畫又無蜂蝶 是必無香花).”라고 하였는데, 씨앗을 심어본즉 과연 향기가 없었다. 이에 선덕여왕의 영민함을 모두가 탄복하였다 한다.

설총의 화왕계

신라 신문왕이 설총(薛聰)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부탁하자 화왕계(花王戒)를 이야기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좋은 봄날 현란하게 꽃핀 화중왕(花中王) 모란이 수많은 꽃 위에 군림하자 천홍만자(千紅萬紫) 꽃들이 화왕의 향궁(香宮)에 입조할 때, 요염한 절세미인 장미가 화왕에게 말하기를 “첩이 일찍 왕의 염덕을 듣고 흠모하는 마음으로 찾아왔으니 행여 버리지 마옵시고 하룻밤 잠자리를 같이 하옵소서.”하고 간하였다.

이때 포의한사(布衣寒士)로 노방(路旁)에 있던 할미꽃도 구부리고 와서 충언직언을 하여 화왕 곁에 있으면서 일하기를 원하며 요염한 여자에게 현혹되지 말기를 간하였다. 그러나 화왕은 벌써 요염한 장미에게 빠져서 할미꽃의 충언을 알면서도 그것을 듣지 않았다.

이것을 본 할미꽃은 분연히 왕에게 아뢰기를 “신이 처음에는 왕의 총민함이 의리를 깨달으리라 믿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그렇지 못한즉 요염한 여인과 가까이 함은 패망을 자초하는 길일 것입니다.”라고 하며 왕에게서 떠나려 하자, 왕도 그제서야 깨닫고 할미꽃에게 사과하였다 한다.

이 이야기를 설총이 신문왕에게 들려주자 왕은 “뜻이 깊은 이야기로서 왕자의 계(戒)가 될 만하니 곧 글로 만들어 오라.”고 하였다 한다.

철쭉과 수로부인

우리나라는 세계적인 철쭉류의 자생지로서 많은 종류가 있는데, 그 이름을 혼돈하는 사람이 많다. 진달래는 후조인 두견새가 울 때 핀다고 하여 두견화라고 하며, 한편 먹을 수 있다고 하여 참꽃이라 하지만, 철쭉은 독이 있어 먹을 수 없는 꽃이라 강원도에서는 개꽃이라 불리고 있다. 산철쭉은 꽃필 때 온 산을 빨갛게 물들인다 하여 영산홍으로 불리기도 한다.

철쭉류 자생국인 우리나라는 이와 관련된 글이 대단히 많다. 『삼국유사』 권2에 소개된 철쭉과 관련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신라 성덕왕 때 수로(水路)라는 미희가 강릉 태수로 가는 남편 순정공(純貞公)을 따라 강릉으로 갈 때의 이야기였다. 따뜻한 봄날에 일행이 가다가는 쉬고 쉬다가는 가는 것이 어느덧 한낮이 되자 해변에서 점심을 먹게 되었다.

그때 준급한 절벽에 현란하게 핀 철쭉꽃을 보고 수로부인이 따라온 종자에게 그 꽃 한 가지를 꺾어오라고 명하였으나, 발을 디딜 곳도 없는 절벽이라서 누구도 엄두를 못 내었다.

마침 한 노인이 암소를 끌고 가다가 부인의 말을 듣고 환심을 사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기어올라가 철쭉을 꺾어다 주고 다음과 같은 「헌화가(獻花歌)」를 지어바쳤다 한다.

“자주빛 바위 끝에, 잡으온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려하시면, 꽃을 꺾어 받자오리이다(紫布巖乎邊希執音乎手母牛放敎遣 吾肸不喩摲肸伊賜等 花肸折叱可獻乎理音如).”(양주동 해석)

작약과 제국공주

옛날부터 중국에서는 모란을 화중왕, 작약을 재상이라 하여, 모란과 작약은 왕과 재상으로 비교되어 사랑을 받아왔다. 우리나라에서는 작약을 함박꽃이라 하는데, 꽃모양이 함지박처럼 크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고려 때 충렬왕은 원나라 세조(世祖)의 외딸 제국공주(齊國公主)를 왕비로 맞았다.

왕비가 된 공주는 어느 날 수녕궁(壽寧宮) 향각(香閣)의 어원(御園)을 산책하다가 작약이 탐스럽게 피었으므로 시녀에게 명하여 한 가지를 꺾어오게 하였다. 한 가지를 꺾어들고 한참 귀여워하더니 그만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이로부터 병이 들어 얼마 뒤에 죽었다는 슬픈 애화가 있다.

작약은 봄에 줄기가 나와서 5∼6월에 핀다. 제국공주가 향각에서 소요하던 때는 5월이라 모란은 시들고 작약이 만개하였으며 송경(松京)의 궁에는 작약이 많이 심어졌는데, 제국공주도 이 아름답게 핀 작약을 보고 잠재의식 속에 생명의 무상함을 직관하면서 슬피 눈물을 흘린 것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연꽃과 충선왕

인도 원산인 연꽃은 불교문화가 들어오면서 불상·불화·불구에 널리 쓰였다. 불교의 신앙으로 연꽃을 너무 신성시하여 고려 때는 연뿌리와 연꽃봉오리까지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여 종교적인 일화가 대부분이었다.

고려 충선왕이 원나라 서울 연경에 있을 때 궁궐 안에 있는 아름다운 미녀와 가연을 맺게 되었다. 그 뒤 고려로 돌아오게 되어 두 사람은 슬픈 이별을 하게 되었다. 하염없는 눈물로 이별을 아쉬워하는 궐녀에게 정표로 연꽃을 선사하니 그녀는 다음과 같은 시를 써서 충선왕에게 바쳤다 한다.

“떠나시던 그날에 꺾어준 연꽃 한송이 처음엔 빨갛더니 얼마 안되어 떨어지고 이제는 시드는 빛이 사람과 같사오이다(贈送蓮花片 初來灼灼紅 辭枝今幾日 憔悴與人同).”

패랭이꽃을 읊은 시인

고려 때 정습명(鄭襲明)은 고려 말 충신인 정몽주(鄭夢周)의 선조로서 성격이 강직, 고결하여 고려 의종이 매일 방탕과 호사스런 연회를 즐기자 죽음을 무릅쓰고 간한 강직한 사람이었다.

패랭이꽃은 우리나라 자생 꽃으로 산야에 널리 자라고 있는데, 정습명은 외국에서 도입된 모란·작약·봉선화·양귀비꽃과 같은 요염한 꽃보다 산야에 묻혀 꽃피는 평범한 자생화를 비유적으로 예찬한 것이다.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세상사람들이 모란을 사랑해서 정원에 많이 재배하고 초야에 저절로 자라는 패랭이꽃은 좋은 꽃떨기가 있어 색채와 향기가 달 아래서나 바람 앞에서나 다 운치가 있어도 공자 왕손 같은 귀부인이 오지 아니하는 유벽(幽僻)한 곳에 피어 있으므로 평범한 농부인 야인이 그 교태를 차지하도다(世愛牡丹紅 栽培滿院中 誰知荒草野 亦有好花叢 花透村塘月 香傳朧樹風 地偏公子小 嬌態屬田翁).”

이는 패랭이꽃 같은 평범한 꽃을 예찬함으로써 민중의 소중함을 일깨운 선조들의 선견지명을 보여주고 있다.

꽃의 상징성

꽃은 주로 아름다움·화려함·번영·영화로움 등 긍정적 의미를 지니고 있어 아름다운 여자나, 좋은 일, 영화로운 일에 비유되기도 한다. 과거에 장원급제한 사람이 머리에 꽂는 어사화는 영화로움을 상징하는 것이고, 경사스러운 일은 ‘웃음꽃이 핀다.’, ‘그 집안에 꽃이 폈다.’ 등으로 표현된다.

또한, ‘꽃 같은 시절’이라 하여 젊음을 상징하기도 하며 사랑을 상징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국화(國花)·교화(校花)·사화(社花) 등 한 집단을 상징하기도 한다. 우리 선조들은 꽃에도 품계나 등수를 매겼는데, 꽃의 아름다움보다도 꽃이 지닌 상징적 의미에 따라 품계가 결정되었다.

강희안은 뛰어난 운치나 절개를 의미하는 매화·국화·연꽃·대나무를 1등으로, 부귀를 의미하는 모란·작약·왜홍(倭紅)·해류(海榴)·파초를 2등으로, 운치가 있는 치자·동백·사계화(四季花)·종려·만년송은 3등으로, 화리(華梨)·소철·서향화(瑞香花)·포도·귤은 4등으로, 석류·도(桃)·해당(海棠)·장미·수양버들은 5등으로, 진달래·살구·백일홍·감·오동은 6등으로, 배·정향·목련·앵도·단풍은 7등으로, 무궁화·석죽·옥잠화·봉선화·두충(杜冲)은 8등으로, 해바라기·전추라(翦秋羅)·금전화(金錢花)·석창포·화양목은 9등으로 분류하였다.

또한 소나무·대나무·연꽃·국화를 1품으로, 모란을 2품으로, 사계화·왜철쭉·영산홍·진송·석류·벽오동을 3품으로, 작약·서향화·노송·단풍·수양버들·동백을 4품으로, 치자·해당화·장미·홍도(紅桃)·벽도(碧桃)·삼색도(三色桃)·백두견(白杜鵑)·파초·전춘라(翦春羅)·금잔화를 5품으로, 백일홍(百日紅)·홍철쭉(紅躑躅)·홍두견(紅杜鵑)·두충(杜冲)을 6품으로, 이화(梨花)·행화(杏花)·보장화(寶薔花)·정향·목련을 7품으로, 촉규화(蜀葵花)·산단화(山丹花)·옥매(玉梅)·출장화(出墻花)·백유화(白萸花)를 8품으로, 옥잠화·불등화(佛燈花)·연교화(蓮翹花)·초국화(草菊花)·석죽화·앵속각(罌粟殼)·계관화(鷄冠花)·무궁화를 9품으로 분류하기도 하였다.

『양화소록』에서는 대표적인 꽃의 상징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즉, 매화는 강산의 정신이 깃들여 있으며 태고의 모습이 드러난다고 하였고, 국화는 혼연한 원기(元氣)는 그지없는 조화(造花)라고 하였으며, 연꽃은 깨끗한 병속에 담긴 가을 물, 비 갠 맑은 하늘의 달빛, 봄볕과 함께 부는 바람이라 하고, 모란은 부귀번화(富貴繁華)하다고 표현하였다.

생활 속의 꽃

우리 민족은 옛날부터 평화를 사랑하고 풍류를 좋아했으며, 산수절경에 싸여 꽃과 함께 시와 노래를 즐겨 불렀다. 온대지방에 속해 있는 우리 나라는 춘하추동이 뚜렷하기 때문에 긴 겨울을 지나 봄이 되어 꽃이 피면 온 백성이 나와 꽃놀이를 하고 가을에도 꽃필 때는 꽃과 함께 즐거움을 나누었다.

물이 흐르고 산이 있고 맑은 햇빛이 비치는 곳에 집을 짓고 자연 속에 동화되어 꽃을 사랑하며 살았다. 국난이 잦았지만 그런 중에도 꽃에 대한 낭만적인 생각은 시나 시조, 가사 등에서 엿볼 수 있으며 낙천적 성격을 가졌다.

근대에 들어 경제개발에 힘입어 국민소득의 향상으로 인구가 도시와 공장지대로 집중되면서 자연을 그리워하는 본능에서 실내원예, 또는 녹지공간에 꽃을 많이 심어 인간의 고독감과 산업사회의 긴장을 해소시키는 노력을 하고 있고, 국가에서도 국토미화(國土美化)나 국민정서교육을 위해 꽃사랑을 권장하고 있다.

민속

봄에 꽃이 피면 사람들은 산과 들로 나가서 진달래꽃으로 화전이나 화채를 만들어 먹으며 꽃놀이를 즐겼다. 젊은이들은 꽃을 뜯어 수효의 많고 적음을 내기하거나, 꽃의 턱을 맞걸어 당겨 떨어지고 안 떨어지는 것으로 승부를 가리는 꽃쌈(또는 꽃씨름)을 하였다. 처녀들은 제비꽃과 토끼풀로 반지를 만들거나 봉선화 꽃잎을 괭이밥잎과 함께 찧어 손톱에 붙여 물을 들였다.

아이들이 긴 꼬챙이에 꽃나무 가지를 묶어가지고 노는 꽃방망이놀이도 있었다. 단옷날에는 꽃창포를 삶은 물로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하면 예뻐지고 일년 내내 무병하다는 속설이 있어 머리를 감았으며, 음력 9월 9일 중양절에는 교외로 나가 국화주에 국화전을 부쳐 먹으면서 단풍이 물든 산과 들의 정경을 즐겼다.

또, 농촌에서는 이팝나무의 꽃이 만발하면 풍년이 들고, 꽃이 적게 피거나 시들면 흉년이 든다는 말이 있어 꽃이 필 무렵에 나무 밑에서 치성을 올리기도 하였다.

경주 오유리에서는 그곳에서 자라는 등꽃을 말려 금침 속에 넣으면 금슬이 좋아지며, 잎을 삶은 물을 마시면 벌어진 부부 사이가 다시 좋아진다는 말이 전해져서, 신혼부부의 자리 속에 등꽃을 말려 넣는 풍속이 있다.

꽃을 이용한 술

옛 선인들은 민간의학으로 꽃술을 담가 마셨다. 여성의 건강과 미용에 특효한 술로서 모란술·찔레술·잣술을 먹었고, 회춘과 노화 방지에는 국화주·창포주·산수유주를 먹었으며, 소화기능을 돕는 술로는 민들레술·용담주·박하술·물푸레나무술·등꽃술·생강술을 먹었다. 보신과 고혈압에 차술을 먹었고, 특수한 약효를 위해 도라지술·진달래술·산초주·치자주·인동주 등을 먹었다.

꽃장식

꽃이나 나뭇가지·잎 등의 소재들을 꽃그릇에 침봉이나 보습제 또는 그냥 물을 담아 꽂아 장식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꽃장식은 불교와 인연이 깊다.

불교에서는 화만(華鬘:불타를 공양하기 위해 불전의 난간에 생화나 보석 또는 가죽으로 조화를 만들어 달아놓는 것)을 만들 때 꽃장식을 하였다. 이는 인도의 남녀가 몸을 치장하기 위해 향기 있는 꽃을 실로 꿰거나 묶어서 목에 걸거나 몸에 달았던 풍속에서 유래된 것이다.

신라와 고려시대의 불교 전성기에는 불당에 금·은·보석으로 만든 조화 대신 생화(生花)를 꺾어다가 작은 꽃병에 꽂아 두었다. 이처럼 불가에서 성행하던 꽃꽂이가 점차 꽃장식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1829년(순조 29)에 세자가 생각해 낸 가인전목단(佳人剪牧丹)이라는 춤을 출 때에도 꽃병과 모자에 모란으로 장식하였다. 이때 모란꽃병 밑에는 7각의 화단을 만들어 받치게 하였다고 한다.

또 수파련(水波蓮)이라 하여 음식 위에 종이꽃을 꽂는 풍습도 있었다. 이는 큰 잔치가 있을 때 연꽃 세 송이를 한 가지에 달리도록 만들어 음식에 꽂는 것이다. 이 행사에서 부인들은 머리에 꽃을 꽂아 장식하였다. 문인들의 그림에는 항아리나 병에 연꽃이나 모란꽃·매화꽃·종이꽃 등을 꽂은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종이꽃이 크게 유행하였는데 궁중음식이나 사대부 집안 잔치, 아전 또는 서민 계층에까지 널리 사용되었으며, 종교적인 의미가 컸다. 이러한 장식꽃을 전문으로 만든 장인(匠人)을 조화장(造花匠) 또는 지화장(紙花匠)이라 불렀다. 그리고 항아리에 꽃을 꽂는 항아리 병꽂이가 많이 유행하였다.

그 뒤 민족항일기와 6·25전쟁 때는 꽃장식이 피폐된 생활 때문에 별로 이용되지 못하다가,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초반부터 꽃꽂이가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고, 1970년대에 들어서는 꽃꽂이강습으로 일반화되었으며, 꽃소비 증가에 큰 몫을 하고 있다.

꽃장식은 개인이나 지방, 나라에 따라 형이 달라지고, 또한 사용하는 꽃의 종류도 달라진다. 동양식 꽃꽂이는 천지인(天地人:眞善美)을 골격으로 한 선을 중심으로 한 꽃꽂이가 이루어지며, 여기에는 매(梅)·난(蘭)·국(菊)·죽(竹) 등 동양화를 주로 이용한다.

서양식 꽃꽂이는 성화법(盛花法)에 의해 미적 표현을 나타내기 때문에 형을 중요시하여, 장미·글라디올러스·카네이션 등 서양 화훼류가 많이 사용된다.

우리나라에서도 동양식 꽃장식뿐만 아니라 서양식 꽃꽂이도 각종 생활에 많이 이용하는데, 대표적인 형은 원형·수직형·방사형·반원형·편삼각형·정삼각형·호가리티안형·도반월형(倒半月形)이 있고, 주로 보습제인 오아시스를 이용한다. 오아시스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량 수입에 의존했으나, 지금은 우리나라에서도 대량 생산하고 있다.

꽃꽂이는 가정에서 생활에 이용되는 것 외에도 회의식장·결혼의식·장례의식·화환·꽃바구니·코사지·부케(꽃다발)·브라이달(신부 꽃다발)·보토니어(남자용 작은 꽃장식) 등 생활에 이용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이다. 이는 색채학적 원리와 미적 표현원리에 의한 예술창작품으로서 작품적 성격이 강하다. 우리나라에서는 동양식 꽃꽂이 중 독특한 한국식 꽃꽂이형이 개발, 보급되고 있다.

노래와 꽃

우리나라에는 꽃을 주제로 한 타령들이 많은데, 「꽃타령」은 신민요로 자진모리장단의 빠르고 흥겨운 노래이다. 봄철 아낙네들이 동산에 올라 봄놀이를 하며 부르기도 하고 시집간 딸이 친정어버이의 생신을 맞아 친정에 들러 경축하면서 부르기도 하였다.

「꽃타령」은 “꽃 사시오 꽃을 사 사랑 사랑 사랑의 꽃이로구나. 꽃바구니 둘러메고 꽃팔러 나왔소. 붉은꽃 푸른꽃 노랗고도 하얀꽃 남색 자색 연분홍꽃 울긋불긋 빛난꽃 아롱다롱 고운꽃” 또는 “흔들흔들 초롱꽃 달랑달랑 방울꽃 목이 잘린 도라지꽃 맵시있다. 아가씨꽃 부얼부얼 함박꽃 절개 있다. 연꽃이냐 이꽃 저꽃 다버리고 참나리꽃 네로구나.”와 같이 여러 이름을 들면서 그 꽃의 빛깔·향기·모양 등을 그리는 내용이 많다.

우리나라의 자생화

현재 우리나라에서 자라고 있는 자생식물 4,135종 가운데 약 500종은 관상가치가 높다고 보고 있다(관악수목원보고 제1호, 1976). 우리나라는 위도상으로 남위 33°40′에서 북위 43°2′에 걸쳐 남북으로 길게 된 반도로 남해안의 아열대기후로부터 한대기후까지 널리 걸쳐 있어 월동을 위한 내한성(耐寒性)이 문제가 된다.

난지식물(暖地植物) 꽃

기온이 높아 연평균 14℃를 유지하는 제주도와 울릉도 지역에서 자라는 종류로서 상록관엽식물들이 많다. 동백나무·식나무·팔손이나무·감탕나무·먼나무·문주란·아왜나무 등이 있다. 이들은 중부지방에서는 노지월동이 곤란하며 실내식물로 많이 이용된다.

온대식물(溫帶植物) 꽃

북위 35°부터 43° 2′ 사이 자생식물로 소나무와 낙엽활엽수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개나리·진달래·철쭉·미선나무·개느삼·앵초·도라지·꽃향유 등이 이에 속한다.

한대식물(寒帶植物) 꽃

1,000m 이상의 설악산과 1,300m 이상의 지리산, 1,500m 이상의 한라산 고산지에서 자라든가, 연평균 5℃ 정도가 되는 추운 지방에서 자라는 식물로서 주목·구상나무·잎깔나무·분비나무 등의 침엽수와 만병초·금강초롱꽃·들쭉나무 등이 이에 속한다.

계절꽃과 화신(花信)

같은 꽃이라도 남부·중부·북부 등 지방에 따라 개화기가 다소 차이가 있으나 대부분이 봄철에 꽃이 피며 일부가 가을과 여름에 핀다.

따라서, 꽃소식을 알리는 꽃들은 3월 개화하는 종류들로서, 긴 겨울 동안 얼어붙은 대지를 녹여주는 화사한 봄날을 알리는 희소식이기도 하다.

남쪽부터 따뜻해지는 기후 탓으로 제주도에서부터 오며, 가장 먼저 꽃피는 것이 풍년화·산수유·매화·개나리·진달래로서 지역에 따라 다른데, 개나리와 진달래의 첫 꽃소식은 3월 20일경에 남쪽으로부터 온다. 한편, 벚나무는 3월 30일경이 되며 5일 후인 4월 5일쯤 강남갔던 제비가 남쪽에서 첫 상륙한다.

화훼산업

역사

조선시대 이전의 꽃은 왕을 중심으로 한 궁정 원예와 귀족들의 전유물이었고, 취미 원예의 성격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꽃이 상품생산적 산업으로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후반의 일이다.

물론 그 전에도 시장에는 화원이 있고 상품거래가 있었지만 꽃시장이 개설된 것은 1969년 서울 남대문시장에서였다. 그 뒤 서울 서초동에도 여러 꽃재배농가가 모여 꽃마을단지를 형성하였다.

이때가 1천 달러 정도의 국민소득기로서 경제적 여유가 생기기 시작하던 때였다. 꽃마을단지 조성에 독농가인 왕원식(王元植)과 여대기(余大基)의 노력이 컸다.

인천 부평 지역에서 글라디올러스 절화생산, 계산동 서곶에서 구근류 등 산업적인 절화생산을 하기 시작하였고, 김해와 부산에서는 카네이션을 대량 생산하기 시작하였으며, 구근류 등 품목도 다양화하여 국내 절화수요의 대부분을 이 지역에서 생산하였다.

1970년대부터는 제주도에서 강봉조 등이 동양란·양란 생산단지를 이루었다. 1980년부터 경기지방에서 꽃을 생산하던 김명호 등이 서귀포지역에 이주하여 본격적인 절화생산을 시작하여 나팔나리·숙근안개초 등을 대량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농가들은 우면동으로 이주하여, 2000년 현재 우면동에 큰 화훼농업단지를 이루고 있고,세곡동 헌인릉, 성남, 고양시 등도 최근 늘어나고 있으나 운반이 용이한 것 등 동계생산은 제주도와 남부지방에서, 여름생산은 강원도 고랭지에서 생산되고 있다.

생산현황

우리나라 꽃 생산은 꾸준한 경제성장에 힘입어 수요증가가 일어나 1980년대 후반부터 꽃의 문화와 산업화가 현저한 발전을 보이고 있다. 최근 WTO체제 출범 후 화훼 수출량이 늘어나면서 성장 작목이며, 고부가가치산업으로 주목을 받으면서 전업농가가 늘어나고 있다.

화훼생산액은 1975년을 기준으로 하였을 때 1980년에는 3배, 1985년에는 11배, 1990년에는 36배, 1995년에는 76배, 1998년에는 87배의 급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1975년을 기준으로 1985년부터 수입이 수출보다 더 많아지기 시작하여 1975년에는 수입이 수출액(783만 달러)의 44배나 많아 3500만 달러나 수입되었다.

주요 수출품목은 접목선인장이 가장 많고 다음이 절화 나리류와 절화장미류가 주종을 이루고 잇고, 수입은 란류(동양란, 양란), 구근류, 및 관엽 등의 묘목 등이 대부분이다. 한국경제위기인 IMF를 지나면서 1998년에는 수입이 급감하여 수입과 수출이 거의 같은 수준에 이르렀다.

따라서 수출을 늘리고 수입을 줄이기 위해 수입 꽃의 국산화가 문제이다. 2000년 현재 국내 꽃 산업의 과제는 자생식물의 개발과 적지적작(適地適作), 내수촉진, 생산자 단체 육성, 유통구조개선, 신품종육성 등이다.

국내 꽃 생산은 1998년 현재 절화 비중이 가장 높아 45.6%인 2667억 원이 생산되고 있으며, 장미·국화·카네이션·나리류가 주종을 이루고 있고 다음은 분화류로서 36.5%인 2136억 원으로 란류, 관엽류 아잘레아, 포인세치아 등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다음은 관상수(11%)와 화목류(5%)이고, 구근(1.1%)과 종자(0.05%)는 아주 미약하다. 절화의 주산지는 경상남도, 경기도, 제주 지역과 전라남도, 전라북도이고 분화는 경기도와 서울 등 수도권이 대부분이고 일부 제주도 및 남부지방에서 생산되고 있다. 화목류는 전라남도, 전라북도 지역에서, 관상수는 충청북도, 경상남도 지역에서, 구근은 강원도에서 많이 생산되고 있다.

우리나라 화훼 산업의 발전은 최근 크게 발전되었는데 그 원인은 다음과 같다. 즉 정부에서 수입개방, 농수부의 과수화훼과 신설, 「농산물가격유지법」에 도매시장 거래품목으로 꽃을 추가하고 서울 양재동에 화훼공판장을 만들어 전자경매를 시작하고 정부의 보조금과 융자 등의 정부시책에 그 원인이 있다.

꽃은 다른 어느 농작물보다 수익성이 높기 때문에 과잉생산이 우려되지만, 국민생활수준의 향상과 국제화에 힘입어 앞으로도 꾸준한 신장이 있을 것으로 본다.

세계의 화훼 소비와 생산 현황을 보면, 1995년 현재 1인당 꽃 소비액은 노르웨이가 146달러로 가장 높고 다음이 스위스·독일·덴마크순이고 한국은 14달러를 소비하고 있다. 꽃 소비액은 미국이 가장 많고 다음이 일본·독일·이탈리아순으로 인구가 많고 GNP가 높은 나라에서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꽃 생산량이 가장 많은 나라는 네델란드로서 약 72억 달러를 생산하고 다음이 일본으로 62억 달러가 생산되었으며, 한국은 약 4억 8000만 달러가 생산되었다. 세계 꽃 교역의 주종을 이루는 절화의 수출을 보면 네델란드가 28억 달러로 가장 많고 다음이 벨기에이고 한국은 700만 달러를 수출하였다.

꽃 재배와 관리

우리 조상들은 한 포기의 풀이나 나무가 살아가는 이치를 생각하여 근원까지 파고들어가 깊이 연구하여 습득하면 자연을 초월한 원리를 해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배양토 준비, 개화촉진법, 화분관리법, 화분의 월동법, 꽃을 가꾸는 자세 및 꺾꽂이[揷木] 등에 대하여 당대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였다. 『양화소록』에 수록된 꽃재배법은 다음과 같다.

화분의 흙준비·관수·거름주는 법

겨울철에 잘 썩은 진흙을 파서 볕에 쪼여 말린 뒤 체로 이물질을 없애고 인분을 앙구어서 띄웠다가 사용한다. 또한, 마른 풀과 흙은 층층으로 깔고 불을 놓아 태워서 간직해 두었다가 음력 정월에 꽃을 심는다.

비료로는 인분의 맑은 것을 떠서 주는데, 꽃씨가 싹이 틀 때는 거름물을 주지 않고 새순이 나와 꽃망울이 생기면 바로 거름물을 주며 꽃핀 뒤에는 거름을 주지 말아야 한다.

열매 맺는 것은 열매가 맺힌 뒤에는 거름과 물을 주지 말 것이며 거름을 주면 열매가 떨어진다. 음력 3월과 4월 사이 늦게 분에 심으면 죽으니 조심하고, 뿌리가 길면 꽃이 생기지만 뿌리가 너무 많으면 꽃이 피지 않는다. 거위똥이나 누에똥 또는 말똥을 물에 담가 액비로 사용한다.

흙을 장만할 때는 적토든 흑색 토양이든 상관없이 차지지 않은 흙을 파서 모래자갈을 쳐내고 맑은 똥물을 뿌려서 띄워말리기를 두서너 차례 하여 사용한다.

꽃을 빨리 피게 하는 법

말똥을 물에 담갔다가 주면 삼사 일 뒤에 필 것이 다음날에 핀다.

화분 놓는 방법

그늘과 햇빛이 번갈아 드는 곳에 화분을 놓는 것이 좋은데 키가 큰 것은 뒤에, 작은 것은 앞줄에 놓아 앞에서 보기좋게 놓되 기왓장이나 벽돌 위에 놓아두는 것이 좋다.

석류·치자·산다화·사계화는 건조를 싫어하니 꽃이 진 뒤에는 땅을 파고 지면과 같게 묻어둔다. 화분은 쌍줄로 놓거나 번갈아 놓아도 되고 정자 사이에 두는 것이 원칙이나 세상사람들은 정원에 늘어놓은 일이 많다고 하였다.

겨울철 화분 저장하는 법

햇빛이 잘 드는 높고 건조한 곳에 흙을 쌓아 토담집을 만들어 남쪽 창문을 관리하기 편하게 넓게 만들고 통기가 잘되게 한다. 지금의 온실이 옛날의 토담집인 것이다.

월동을 위해 화분을 넣는 시기는 서리가 2, 3회 내린 뒤에 들여놓고 따뜻한 날은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아주 추울 때는 짚을 두텁게 덮어두는데, 입춘 후에는 늘 덮어두거나 날씨를 보아 다소 열어두고 한식이 지나면 밖에 내놓는다.

꽃을 기를 때 주의점

담장 가까이 심으면 쓰러지기 쉬우니 이리저리 바꾸어 심고, 거미줄은 해로우니 거미를 잡아주고, 꺾꽂이할 때는 나무꼬챙이로 구멍을 파고 꽂아 흙을 단단하게 다져 그늘에 놓아두는 것이 좋다.

화훼 연구

1886년(고종 23) 최초로 우리나라에 근대 교육기관이 생기고 농학(農學) 중에 꽃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2000년 현재 원예과가 설치된 학교 수는 고등학교의 142개 학급을 포함한 4년제 대학이 39개 학과가 있다. 꽃 연구는 대부분이 국립원예연구소 초본 및 목본 화훼과와 지방자치단체의 도 농업기술원과 대학연구실에서 담당하고 있다.

그동안의 괄목할 만한 연구업적은 신품종 육성(국화·나리·장미·선인장·무궁화·철쭉·칼랑코에 등)·재배법 개선(개화기 조절·배양토 양액구명·절화생산·화단묘·용기재배 등)·번식법 개선(관상수·난·카네이션 등)·무병주 생산(나리류·난류·카네이션 등) 등이 있다.

1950년대 중반부터 대학에서 나오기 시작한 연구논문은 1970년대부터 주로 한국원예학회를 통하여 발표되는데 국내 4년제 39개 대학(국립 19개 대, 사립 20개 대)에서 연구, 2000년 현재 연간 650여 편의 학술연구결과가 발표되는 등 많은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에서 잔디와 무궁화, 고려대학교에서 실내식물연구, 서울시립대학교에서 철쭉과 관엽식물, 서울여자대학교에서 난류, 단국대학교에서 구근류, 원광대학교에서 상사화, 경북대학교와 충북대학교에서 구근류 및 난류, 대구효성가톨릭대학교에서 난과 국화, 영남대학교에서 구근, 제주대학교에서는 자생란 등의 연구논문이 발표되고 있다.

참고문헌

『백화보』(최영전, 창조사, 1970)
『화하만필』(문일평, 삼성미술문화재단, 1972)
『양화소록(養花小錄)』(강희안 저, 이병훈 역, 을유문화사, 1974)
『꽃과 사랑의 전설 신화』(조동화, 민중서관, 1978)
『겨레얼 무궁화』(김석겸, 나라꽃심기운동추진회, 1978)
『백화송』(양인석, 송원문화사, 1980)
『한국원예발달사』(한국원예발달사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0)
『꽃말 꽃전설 꽃에 얽힌 사연들』(하태문 편, 농림출판사, 1982)
『대한식물도감』(이창복, 향문사, 1982)
『나라꽃 무궁화』(류달영·염도의, 동아출판사, 1983)
『1998화훼재배현황』(농림부, 1999)
『화훼원예학총론』(한국화훼연구회, 문운당, 2000)
집필자
이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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