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3월 30일 자유당에서 소외된 조선민족청년단계(朝鮮民族靑年團系, 약칭 族靑系)가 다른 세력을 흡수하여 창당한 온건야당이다.
자유당 비주류계인 자유당 창당파에 속해 있던 이범석(李範奭)·배은희(裵恩希)·이갑성(李甲成)·지청천(池靑天) 등은 무소속의 장택상(張澤相)과 합작하여 신당조직을 비밀리에 구상하고, 이승만(李承晩)과의 합의가 이루어지면 여당으로, 그렇지 못하면 건전야당으로 발족할 것을 꾀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의 반대에 부딪치자 1955년 12월 14일부터 구체적인 신당조직 작업에 들어가, 23일 이범석·장택상·배은희 등 세 사람의 합의성명, 24일 신당 발기취지서와 촉진위원회에 대한 발표를 하는 등 급진전되었다.
이 세 사람을 지도위원으로, 안호상(安浩相)과 그 밖의 20여 명을 위원으로 하여 정강 초안 등을 작성한 발기준비위원회는 1956년 1월 6일 가칭 ‘민정당(民政黨)’이라 하여 지도위원 등 55명을 상임준비위원으로 결정하였다.
민정당은 3월 30일 당명을 가칭 민정당에서 공화당으로 바꾸면서 대의원 1,750명 중 1,352명의 참석으로 발당대회를 열고, 정치의 쇄신과 경제의 균형, 사회의 복리와 문화의 향상, 국토의 통일과 외교의 강화 등 정강을 채택하고, 정치·경제·사회 등 5개 분야의 정책도 밝혔다.
그러나 공화당은 민정당의 발기준비위원회, 공화당의 중앙위원 구성문제, 공화당 부통령 후보자의 지명문제 등으로 족청계와 비족청계 간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4월 1∼4일 사이에 이범석을 중심으로 한 족청계와 장택상·배은희를 중심으로 한 비족청계로 분화되기 시작하여, 사태수습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범석의 부통령 입후보 고집으로 정당 등록도 하지 못한 채 2개의 공화당이 존립하게 되었다.
그 뒤 공화당 이탈파인 비족청계는 공화당에 남아 있던 당원과 합작하여 한국청년정치협회(韓國靑年政治協會)를 조직하였고, 또한 이들은 공화당 재건주장파를 물리치고 신태악(辛泰嶽) 등과 또 다른 신당운동에 합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