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上海) 임시정부의 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낸 지청천(池靑天)이 1945년 12월 환국한 뒤 당시의 모든 청년운동단체들을 통합하여 대동단결을 이룩한다는 명분으로 이 단체를 결성하였다. 광복 후 광복군을 이끌고 국내에 진주하려다 연합군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한 지청천은 국내에 있던 오광선(吳光鮮)에게 지령하여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 광복군 국내 지대를 조직하게 하였고, 이들을 중심으로 하여 청년단체의 조직에 착수하였다.
이때 통합에 호응한 단체는 32개로서, 같은 해 8월서울 충무로에 있는 광청회관(光靑會館)에서 각 단체 대표자들이 회합하여 대동청년단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 준비위원회 임원으로는 위원장 지청천, 부위원장 이선근(李瑄根)·유진산(柳珍山)·이성주(李成株)·선우기성(鮮于基聖), 총무 김후옥(金厚玉)·김성주(金聖柱)·김붕장(金鵬將)·최천옥(崔天玉)·김규룡(金奎龍)·임서영(任曙永), 선전 한철민(韓哲珉)·박영희(朴永熙)·이복원(李復源)·신영순(申永淳)·김강(金剛)이 담당하였다.
또한 조직 장창원(張昌元)·채택룡(蔡澤龍)·이남규(李南奎)·조장수(趙長壽), 섭외 유화청(柳和靑)·오찬관(吳贊瓘)·이민국(李敏國)·김재왕(金載王), 재정 오광선·기성도(奇成度)·이근영(李根永)·권중진(權重鎭), 문안기초 구자흥(具滋興)·손창섭(孫昌燮)·이규섭(李圭燮)·신균(申均)·박용직(朴容直) 등이었고, 서울 운현궁(雲峴宮)에 임시사무소를 두고 결성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각 단체의 해산을 전제로 하였으므로 참가단체들은 통합파와 통합반대파로 분열되는 심각한 진통을 겪어야 하였고, 준비위원회도 많은 파란을 겪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지청천은 결성준비를 강행시켜 1947년 9월 서울운동장에서 수만 명의 단원이 모인 가운데 이성주의 사회로 결성대회를 개최하였다.
지청천의 개회사, 김후옥의 경과보고, 선우 기성의 선언 및 강령낭독, 단장 지청천의 취임인사, 김구(金九)의 훈화 등으로 진행된 결성대회는 지청천 외 108명의 중앙집행위원과 오광선 외 49명의 상무집행위원 및 중앙임원을 선출하고 폐막되었다.
임원은 단장 지청천, 부단장 이성주·오광선, 훈련원장 이선근, 비서장 선우 기성, 차장 이중섭(李重燮), 총무부장 윤익헌(尹益憲), 조직부장 채택룡, 경리부장 조영진(趙英珍), 선전부장 김종철(金鍾哲), 교육부장 한민홍(韓旻洪), 산업부장 장윤필(張允弼), 구호부장 구자홍, 서북사무처장 김인식(金仁湜), 감찰위원장 김윤근(金潤根)·박경구(朴經九)·최용근(崔容根)·김후옥·유몽수(劉夢秀), 회계감사위원장 진헌식(陳憲植), 여성부 이보성(李寶誠)·김봉선(金鳳仙), 공작국장 이주효(李周孝), 홍보국장 박철(朴鐵)·김주영(金周榮), 학생국장 진승국(秦丞國) 등이었다.
이렇게 결성된 대동청년단은 지청천의 개인적인 인기와 더불어 막강한 조직을 갖추게 되었으나, 반공 및 단독정부 수립의 이승만(李承晩)과 민족통일 및 남북협상의 김구(金九)에게로 민족지도노선이 갈라지자 주로 이승만 노선에 맞추어서 활동하였다.
1948년 정부수립 후 이승만은 자신의 지지기반 확보라는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또 하나의 통합청년운동단체인 대한청년단을 조직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대동청년단도 대통령의 명령에 의하여 대한청년단으로 통합, 흡수되어서 그 중추 세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