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송암(松菴). 평안북도 의주 출신.
의주의 일신학교(日新學校)를 졸업한 뒤, 평양의 대성학교(大成學校) 사범과를 졸업하였다. 졸업 뒤 고향에서 상업에 종사하던 중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의주에서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체포의 손길이 미치자 가족을 데리고 만주 관전현(寬甸縣)으로 망명하였다.
간도에 자리를 잡은 뒤, 안병찬(安秉瓚)과 독립운동단체인 대한청년단연합회를 조직하고 교육부원이 되어 만주와 국내 등지를 돌아다니며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한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1920년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을 결성, 총영장(總營長)이 되어 독립군을 편성하여 항일전투를 전개하였다. 이 때 미국 국회의원단이 우리나라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이에 우리 민족의 항일독립운동의 존재를 그들에게 확인시켜주기로 하였다.
광복군총영은 독립군 13명을 세 개 부대로 조직해 서울, 평양, 선천 방면으로 파견하였다. 제1지대 김영철·김성택·김최명은 서울, 제2지대 문일민·우덕선·안경신·장덕진·박태열은 평양, 제3지대 임용일·이학필·김응식·이진무·정인복은 선천 방면으로 잠입하였다. 제3지대는 분대하여 이진무·정인복는 신의주, 임룡일·이학필·김응식은 선천에서 작전을 개시하였다. 이로써 일제의 통치기관을 파괴하고 요인을 암살하도록 하였다.
평양 잠입조는 평안남도 경찰부에, 신의주 잠입조는 신의주역 철도호텔에, 선천 잠입조는 선천경찰서와 선천군청에 각기 폭탄을 던져 폭파하였다. 그러나 서울 잠입조는 총독부 폭파를 계획하던 중 발각, 체포됨으로써 실패하였다.
1922년 재만독립운동단체가 통합하여 결성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의 교통부장·재무부장으로 임명되어 국내외에서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뒤 군사부장 겸 사령장(司令長)이 되어 소속 독립군을 지휘, 활발한 국내 진입작전을 전개하였다.
1925년 대한통의부·의성단(義成團)·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광정단(光正團) 등 10여 개 단체를 규합하여 정의부(正義府)를 결성하고, 군사부위원장 겸 사령장으로 소속 독립군을 지휘하여 국경지방의 일본경찰관서를 습격, 파괴하였다.
대표적인 것은 평안북도 초산경찰서의 추목주재소(楸木駐在所)·외연주재소(外淵駐在所) 및 벽동경찰서 여해주재소(如海駐在所) 습격사건과 1925년 차련관주재소(車輦館駐在所) 습격사건 등이었다.
1926년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1927년 12월 16일 일본경찰의 밀정인 김종원(金宗源)의 모략에 빠져 체포되었다. 국내로 압송되어 신의주지방법원과 평양복심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았다. 경성형무소와 공주형무소에서 복역하였으며, 1934년 20년으로 감형되기도 하였으나 모진 고문 끝에 1944년 5월 공주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