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민족전선연맹 ()

근대사
단체
1937년 중국 난징(南京)에서 조직된 항일민족연합전선단체.
이칭
이칭
민선(民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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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37년 중국 난징(南京)에서 조직된 항일민족연합전선단체.
개설

1937년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을 비롯해 조선민족해방자동맹(朝鮮民族解放者同盟)·조선혁명자연맹(朝鮮革命者聯盟)(일명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조선청년전위동맹(朝鮮靑年前衛同盟) 등 4개 단체가 참가해 결성한 민족주의 좌파계의 항일민족연합전선이다.

연원 및 변천

조선민족전선연맹(이하, 연맹)은 1937년 12월난징에서 결성되었는데, 이 지역이 일제의 침략으로 점령되자 한커우(漢口), 우창(武昌) 등으로 이동했다. 연맹은 1932년의 대일전선통일동맹, 1935년의 민족혁명당의 결성에 이어지는 중국 내 한국 독립운동자의 항일전선통일의 움직임이라는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졌다.

연맹은 조선민족혁명당의 김원봉(金元鳳), 조선민족해방자동맹의 김규광(金奎光), 조선청년전위동맹의 최창익(崔昌益), 조선혁명자연맹의 유자명(柳子明) 등이 대표가 되어 전민족통일전선 결성의 완성을 위한 출발점이 되고자 하였다.

주요 공작방침은, 첫째 조선국내 외의 민족통일전선을 촉진할 것, 둘째 광범한 통일적 중한민족연합전선을 건설할 것, 셋째 전민족을 발동해 직접 또는 간접으로 중국의 항일전선에 참가할 것 등을 주장하였다.

연맹은 군사조직인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를 구성하여 활동하다가 1938년 10월 난징지방이 일본군에게 점령되고 여기에 배치되어 정치공작을 하고 있던 조선의용대가 큰 타격을 입고 우한으로 퇴각함으로써 크게 쇠퇴하였다. 또한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민족전선연맹의 내부에서는 김원봉의 항일노선에 불만을 지닌 좌파세력도 점차 증가하였다.

기능과 역할

연맹은 중국국민당 중앙정부 및 장개석(蔣介石)계의 특무기관으로부터 군자금으로 월 3,000원의 원조를 받았다. 그러면서 국공합작기라는 당시의 상황에서 중국국민당 및 공산당이 지도하는 각종 단체와 연락하면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1938년 10월 연맹 산하에 조선의용대가 조직되었다.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중국 내의 한국인들도 직접 항일전에 참가하기 시작하였다. 연맹의 통제 아래 중국과 함께 조직적으로 항일전에 참가할 부대의 조직이 요구되었다. 이러한 요구에 의해 연맹에서는 1938년 7월 이후 각 방면에서 가맹해 온 좌파의 청년 및 군관학교 출신의 조선민족혁명당원 혹은 특별훈련반을 졸업한 청년 약 100여 명으로 조선청년전시복무단을 조직하고 정치훈련을 강화하는 한편 우한(武漢)에서 중국측의 자위단 근무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연맹의 이러한 노력에 뜻을 같이 하여 각지에서 참가하는 자가 속출해 단원이 약 180명에 이르렀다. 이렇게 되자 단체로서 정식으로 조선민족전선연맹에 가맹하기 위해 같은 해 9월 초순 조선청년전위동맹(朝鮮靑年前衛同盟)으로 개칭하고 선언을 발표하여 조선민족전선연맹의 예하 조직이 되었다고 일제 관헌자료는 전하고 있다. 즉 항일전의 초기에 조선혁명당 내부에서 좌파의 청년들이 전시복무단이라는 이름 밑에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김원봉 등의 조선민족혁명당은 당초부터 무장해 항일전에 참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움직임을 방치한다는 것은 자파 세력의 역량 분산을 초래할 것이었고 또한 중일전쟁은 날로 격렬해지고 있어서 군사조직인 의용대의 결성을 서둘러야 한다는 필요성이 높아져갔다.

그리하여 민족혁명당과 그 민족통일전선인 조선민족전선연맹에서는 정식 결성계획을 1938년 7월 7일 루거우차오사건(蘆溝橋事件) 1주년이 되는 날에 제출하였다. 그 뒤 장개석의 국민당정부의 승인을 얻어 10월 10일 한커우에서 조선의용대를 결성하게 되었다.

조선의용대장으로는 김원봉이 되었다. 6명으로 구성된 지도위원으로 민족혁명당의 이춘암(李春岩), 해방동맹의 김규광, 전위동맹의 최창익, 무정부주의자연맹의 유자명 등 조선민족전선연맹의 지도자들이 선임되었다.

당시 조선의용대는 중국국민정부군 산하의 중국군사위원회 정치부 관할 하에 두었다. 국공합작의 이 시기 군사위원회 정치부의 진용도 부장은 용공항전파의 천청(陳誠), 부부장은 공산당의 저우언라이(周恩來)와 제3당의 황기상이었으며 병력은 약 3개 중대였다.

조선의용대 출범 당초의 대원수는 120명, 본부임원 14명, 제1구대 박효삼대장 이하 42명이 호남·강서 방면을 담당하고, 제2구대 이익봉대장 이하 74명이 안휘·하남 방면을 맡고 있었다.

1940년 2월 조선의용대 본부임원 94명, 제1지대 박효삼 지휘 아래 78명, 제2지대 이익성 지휘 아래 75명, 제3지대 김세일 지휘 아래 63명 등 모두 300여 명으로 증원되었다. 조선의용대는 중국 국민군 산하의 전지공작대(戰地工作隊)로서 중국의 항일전을 지원하는 국제지원군의 성격을 띠었다. 그리고 한국의 독립쟁취를 위해 싸우는 혁명무장세력으로서 정치적으로는 민족적 독립성을 유지하였다.

의의와 평가

조선민족전선연맹의 결성은 1932년의 대일전선통일동맹, 1935년의 민족혁명당의 결성에 이어지는 중국 내 한국 독립운동자의 항일전선통일의 움직임이라는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이 연맹은 참가단체의 단일당으로서 합당이 아니라 민족통일전선을 목표로 한 협의기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는 당시 중국의 국공합작에 의한 항일통일전선형성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으로, 항일통일전선의 기운은 성숙되고 있었지만 아직 김구(金九) 등 우파민족주의자들과는 제휴하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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