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동학의 교단 조직은 동학교도의 무리를 포(布, 包)라 하였고, 모이는 곳을 접(接)이라고 하였다. 여기의 우두머리를 대접주(大接主)라고 불렀고, 아래로 수접주(首接主) · 접주(接主)를 두었다.
그리고 서로 존칭해 접장(接長)이라 불렀고 상대방에게 자기를 하접(下接)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처음에는 동학의 교세 범위에 속하는 전국 각 고을[邑]에는 일종의 교구제(敎區制)인 접을 설치하였는데 이를 대도소(大都所)라고 하였다.
처음의 대도소는 접의 다른 호칭에 지나지 않았으며, 여기에는 한 사람의 접주를 임명해 교단의 행정을 맡기고 이를 집강(執綱)이라고 하였다. 여기의 접주는 교화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집강은 교정적(敎政的)인 성격의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대도소 아래 도소(都所)를 두었는데 대의소(大義所)라고도 불렀으며, 도로에 있어서는 행군의소(行軍義所)라고 하였다.
그러나 동학 농민군에 의한 집강소 설치기에는 대도소가 접의 상급 기관으로서 변질된 것 같다. 동학 농민군의 전주성 점거 후 전주화약(全州和約)에 의해 설치된 집강소는 지방행정을 장악해 이를 총지휘하는 본산 구실을 하였다.
전봉준(全琫準)이 호남의 53읍(邑)의 관아에 각각 집강소를 설치하였을 당시 전주에 대도소를 설치함에 따라 전라 우도가 그의 세력권 안에 들어간 것은 대도소가 집강소를 지휘 아래에 두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전라 좌도를 그 세력권 아래 둔 김개남(金開南)의 경우도 남원에 대도소를 설치함으로써 호남 지방은 사실상 두 개의 세력권으로 양분되었으리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