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의 『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갑오년(1894)에 동학도들이 서로를 접장이라 불렀는데, 세속에서 접장은 문사(文士)를 일컫는 말'이라 하였다. 특히 동학농민혁명 당시 한 무리를 이끄는 접(接)의 우두머리를 특별히 접주(接主)라 부르기도 하였으며, 접의 규모는 대략 60~70명으로, 접원(接員)이 백 호를 넘으면 두 접으로 나누는 것이 상례라 하였다. 동학농민군은 노소 귀천 남녀를 가리지 않고 서로 존대하는 평등의 용어로 ‘접장’이라 불렀다고 하는데, 오늘날 국궁 활터에서는 한 순 5발의 화살을 모두 과녁에 맞히는 몰기를 한 사람을 대접해서 ‘접장’이라 부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