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지는 국민의 지적 수준을 말하며, 인민지혜의 줄임말이다. 을사조약 이후 국권 침탈에 대응하기 위하여 다양하게 나타난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당시의 지식인들은 대중계몽과 학교교육을 통하여 ‘민지’를 계발하고자 하였다.
민지라는 단어는 1898년 변법자강운동의 실패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중국 사상가 양계초(梁啓超)가 근대적 국민 형성을 위한 민간 계몽활동의 일환으로 민권(民權)을 강조하였는데, 그 핵심은 민지(民智)를 넓히고 민기(民氣)를 진작시키는 것이었다. 양계초의 『신민설(新民說)』 등에서 보이는 민권 개념은 근대국가의 인민들이 갖춰야 할 천부적 자격으로, 당시 우리나라의 계몽주의적 선각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02년 3월 21일자 『 황성신문』에는 '필수민지개명(必須民智開明)하며'라는 내용이 보이고, 1905년 이후 『황성신문』과 『 대한매일신보』 등에도 ‘민지’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특히 1906년 5월 설립된 「대한자강회 취지서(大韓自强會趣旨書)」에서는 '무릇 교육이 흥하지 못하면 민지가 미개하고'라 하여, 교육을 통한 민지의 개발을 논하고 있다. 이 취지서는 '민지를 열고 국력을 양성하는 길은 교육과 산업의 발달'이라는 두 가지 기둥으로 뒷받침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민지’라는 용어는 민지개도(民智開導), 민지일개(民智日開), 민지개명(民智開明), 민지유명(民智牖明), 민지발달(民智發達), 민지계발(民智啓發) 혹은 민지미개(民智未開), 민지부루(民智腐陋)와 같은 사자성어 형태로도 보이는데, 이는 민지라는 용어도 미개-반개화-개화라는 사회진화론적 관념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