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계몽사상’이라 지칭하기도 하나 계몽주의라고 할 때는 운동의 성격을 강조하거나 또는 17, 18세기 유럽의 계몽사상과 아울러 그 이후 다른 지역에서 전개된 계몽의 성격을 띤 사상운동을 지칭하는, 보다 포괄적인 개념이다.
계몽주의의 사상적 기반은 17세기의 합리주의와 로크(Locke,J.)의 철학 및 정치사상·자연법, 그리고 뉴턴(Newton,I.)의 기계론적 우주관이었다. 계몽주의자들은 철학자가 아니라 보급자 또는 평론가들이었다. 그들은 일반인들이 접할 수 없었던 저작들을 읽고 대중에게 전달되도록 그 내용을 풀어 설명하였다.
문인·자유기고가·저널리스트로서 그들은 사회악을 비판하고 개혁을 주장하는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였고, 이러한 사조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다가 뒤에는 유럽 여러 나라에 전파되었다.
계몽사상가들의 주장들은 한편으로는 18세기 러시아의 여제 예카테리나,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5세(Joseph),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Friedrich) 등 계몽전제군주들에게 온건한 개혁수단의 근거로 수용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반민중의 저항정신을 각성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계몽사상가들은 결코 권위와 전통에 대한 저항으로서 혁명을 주장하지는 않았으나, 일반민중은 혁명의 합리화를 계몽사상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계몽사상은 미국혁명과 프랑스혁명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우리 나라의 계몽주의는 계몽사상·애국계몽운동·계몽주의문학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우선 사상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것은 서양철학의 수용과 전개라는 시각에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유길준(兪吉濬)은 합리적 자유주의 정신 위에서 실리를 추구한 현실주의자이며, 구습을 타파하고 서양의 선진문명을 받아들이기를 열렬히 주장한 공리주의적 계몽주의자였다. 그는 스펜서(Spencer,H.)의 진화론을 소개하였고, 철학을 ‘공용(貢用)의 학’이라고 보았는데, 이는 당시 일본과 미국에서 유행하였던 프랑스 계몽사상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 것으로 간주된다.
한편, 서재필(徐載弼)은 우리 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계몽사상가로 불리는 인물이다. 그는 <독립신문>이나 강연을 통하여, 자유·평등·권리의 중요성과 실용적인 학문, 법치주의론을 전파하였으며, 그의 이러한 노력은 개화운동을 대중적인 시민운동의 차원으로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또 전병훈(全秉薰)은 ≪정신철학통편≫에서 직접 루소(Rousseau,J.J.)·몽테스키외(Montesquieu)·칸트(Kant,I.) 등과 같은 인물들을 소개하였다. 그러나 사상적인 측면에서 볼 때 우리 나라의 계몽주의는 현실인식과 관련되어 그 이론이 크게 심화되었다든가, 다른 학문분야에 영향력을 끼친 점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우리 나라에서는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뒤, 일제로부터 침탈당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애국계몽운동이 전개되었다. 민족산업을 육성하여 자립적인 경제부강을 이룩하려는 산업개발운동, 민족의식을 높여 자주독립의 기반을 조성하려는 언론운동·국민교육운동 등이 애국계몽운동의 중심을 이루었다.
보호국체제 아래에서 애국계몽운동은 정치운동으로서의 성격이 약화되고 사회운동 중심으로 전개된 것이 특징이다. 개항 이후 일제를 비롯한 외국자본이 밀려오자, 이에 대항하면서 민족자본을 육성하려는 노력이 전개되었으나 정부의 지원능력이 미약하여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애국계몽운동은 신문발행을 통한 언론운동의 성격을 띠고 전개되기도 하였다. <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제국신문>·<만세보>·<대한민보> 등이 간행되어 국민계몽과 애국심의 고취에 큰 구실을 담당하였다. 양기탁(梁起鐸)·신채호(申采浩)·박은식(朴殷植)·장지연(張志淵) 등은 일제의 침략상을 폭로하고 사설을 통하여 전국적인 계몽운동을 펼쳤다.
한편, 국민교육운동의 성과도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갑오경장 이후 정부가 근대교육을 보급시키기 위하여 관립학교를 전국에 걸쳐 설립하였으나, 보호국체제 아래서는 정상적인 민족교육기관으로 성장하기 어렵다는 것을 인식한 민간유지들이 사립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확대시켜나갔다.
특히, 기독교 계열의 학교 수가 크게 증가하였다. 한글에 대한 연구도 주시경(周時經) 등에 의하여 본격화되어 국문연구소가 설치되고, 한글소설·한글신문이 간행되어 한글이 점차 보급되어 나갔다. 역사서적을 간행하여 애국사상을 고취시키려는 시도도 있었다.
한편, ≪을지문덕전≫·≪강감찬전≫·≪이순신전≫ 등 외적의 침입을 물리친 우리 나라 영웅들의 전기와, 외국에서 애국운동과 혁명운동을 전개한 인물들의 전기인 ≪이태리건국삼걸전 伊太利建國三傑傳≫·≪워싱톤전 華盛頓傳≫·≪피터대제 彼得大帝≫ 등이 출판되어 국민들에게 읽힘으로써 독립의지와 역사의식이 고양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애국계몽운동은 그 성과에도 불구하고 오랜 전제지배체제 아래에서 국민 개개인의 인권이나 창의력,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 애국심이 성장할 여건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많은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계몽주의문학은 18, 19세기의 실학파(實學派)에게까지 소급하여 살필 수 있겠으나, 1900년대에서 1910년대까지 뚜렷한 모습을 드러냈다고 하는 견해가 일반화되어 있다.
그런데 그 기간에는 의식과 문화의 근대화를 기본적인 노선으로 삼으면서 이와 함께 일제의 침략에 맞서 국권을 수호하는 것이 또한 긴요한 과제였으므로, 이 두 가지 과제를 어떻게 연결시키는가 하는 데 따라 계몽주의문학이 두 가지로 나타났다.
신채호·박은식·장지연 등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첫번째의 계몽주의문학은 근대화를 통하여 국권을 수호하자는 것을 기본노선으로 삼았다.
흔히, 애국계몽운동이라고 일컬어지는 운동을 언론과 출판을 통하여 전개하면서, 성리학적인 명분론에서 벗어나 민족의 위기를 바로 깨닫고 개혁과 구국의 의지를 가다듬자고 하였다.
주동자들은 한문학에 대하여 깊은 소양을 가지고 있었으나, 새 시대의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국한혼용문(國漢混用文)을 기본문체로 택하여 광범위한 독자를 끌어들이며, 민족사에 대한 재인식을 근거로 당대의 문제를 다루어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고자 하였다.
그렇게 하는 데 있어서 가장 긴요한 장르는 역사적 영웅의 행위를 찬양하는 전기였으며, 신채호의 ≪을지문덕≫ 등이 그 좋은 예이다.
구국의 영웅에 대한 소재를 밖에서도 구하여 박은식은 ≪서사건국지 瑞士建國誌≫를, 장지연은 ≪애국부인전≫을 내놓았다.
이와 함께, 가사의 형식을 개조하여 친일과 매국 책동을 비판하고 풍자하는 노래를 신문을 통해서 다수 발표하여 전통의 현대적 계승을 위한 방향을 제시하였다.
첫번째 단계의 계몽주의문학이 1910년 식민지화와 더불어 직접적인 탄압의 대상이 되자 이와는 다른 두 번째 단계의 운동이 확대되었는데, 그 주동자는 최남선(崔南善)과 이광수(李光洙)였다.
이들은 민족의 수난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지 않고 문학표현의 근대화를 기본과제로 삼았다. 또한 민족의 전통을 계승하는 것보다는 서양 또는 일본 근대문학의 전례를 이식하는 것이 더욱 긴요한 방법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최남선은 신체시(新體詩)를 시험하고, 이광수는 <무정 無情> 등의 새로운 소설을 마련하였다.
구시대의 속박에서 벗어난 젊은이가 감정의 자유로운 발산을 주장하며, 문명개화가 이룩될 미래에 대하여 낙관적인 기대를 가져 마땅하다는 생각을 언문일치의 국문문체로 나타내었다.
이렇게 하여 전통적 가치를 부정하는 충격을 일으켰으나, 그 노선이 민족해방의 의지와 어긋났으며 지적으로 성숙되지 않은 단순논리에 의거하고 있었으므로, 1919년 이후의 문학운동이 등장하자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한편에서는 식민지적 현실의 인식과 비판이 강조될 때, 이광수는 민족의 정신개조가 선행과제라면서 <민족개조론 民族改造論>을 내놓아 더욱 궁지에 몰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두 단계의 계몽주의문학은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작가는 시대의 선각자이고 민족의 지도자라고 하였다. 문학은 독자의 정신적인 각성을 촉구하는 것을 사명으로 한다고 하였다.
작가는 문학창작의 예술적인 과업을 담당해야 한다거나, 현실인식과 민중생활에서의 문제발견을 위하여 자기비판을 앞세워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자, 계몽주의문학은 설득력을 잃었다. 어느 쪽이든지 문학창작방법의 개척을 축적하지 못한 것도 공통적인 한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