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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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학가 / 동학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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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시가
개념
동학교단에서 동학사상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만든 가사.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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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동학교단에서 동학사상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만든 가사.
내용

동학사상을 국문만 해득하는 일반민중 또는 부녀자들에게까지 널리 알리기 위한 것으로, 그 내용은 한문으로 된 경전보다 오히려 더 중요하다. 전통적인 가사형식을 따르면서 난해하지 않은 서술을 통하여 사상을 전달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널리 호응을 받을 수 있었다.

전해진 과정은 두 가지로 생각된다. 동학교도들이 암송하거나 노래로 부르면서 전하기도 하였고, 몇 차례 목판본으로 간행하기도 하였다. 암송하거나 노래로 부를 수 있게 한 것은 가사를 택할 때 이미 의도하였던 바이다.

그러나 구전하면서 내용이 달라지기만 하면 경전으로서의 의의를 상실할 염려가 있기 때문에 기록하여 두는 데 그치지 않고 목판본으로 간행하기도 하였다. 가사가 목판본으로 간행된 것은 흔하지 않은 예이다.

그 첫 작품은 최제우(崔濟愚)가 1860년(철종 11)에서 1863년 사이에 지은 『용담유사(龍潭遺詞)』에 수록된 것들이다. 최제우는 동학을 창건하면서 가사를 지어 자기 사상을 폈다. 작품은 모두 9편인데, 한문경전인 『동경대전(東經大全)』과 내용은 유사하면서도 개인적인 고민까지 곁들여서 더욱 절실하다.

초기 동학사상연구의 가장 소중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문학사에서도 획기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특히, 조선왕조의 통치는 한계에 이르렀고 서양의 침공의 위기를 날카롭게 간파하여 가난하고 천한 백성이 각성하여서 새 세상을 이루어야만 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주장을 설득력 있게 나타낸 점은 높이 평가될 수 있다.

최제우가 순교한 다음 도통을 이은 최시형(崔時亨)은 비밀리에 교세확장을 꾀하면서, 1880년(고종 17)에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간행하였다. 그 중에서 『용담유사』는 암송하고 있던 것을 정착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그 뒤에도 동학교단에서는 많은 가사를 지었는데, 작자 미상인 것도 있고, 용호대사(龍虎大師)라는 미지의 인물이 지었다는 것도 있다.

그런데 가장 방대한 자료는 경상북도 상주지방에서 남접(南接)으로 자처하면서 동학교라는 교단을 따로 연 김주희(金周熙)가 1922년부터 1933년까지 간행한 것이다. 수록된 가사는 100편에 이른다.

그 중에는 『용담유사』도 수록되었지만, 대부분은 김주희 자신이 지은 작품이라고 전한다. 내용을 보면, 교리를 관념적으로 풀이한 것들이어서 최제우의 가사와는 성격이 달라졌다.

동학가사는 가사문학사에서 말기에 해당하는 위치를 차지한다. 가사는 처음에 불교가사로 출발해서 사대부가 유학사상을 나타내는 유학가사를 주류로 하여 굳건한 자리를 잡았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풍속가사·기행가사·규방가사 등으로 성격이 다양해지고, 천주교의 전래와 함께 천주가사도 나타났다. 동학가사는 이러한 추세에 힘입어 나타났으며, 내세우는 사상에서 멀리는 불교가사·유학가사, 가까이는 천주가사와 대립적인 위치에 선다.

그런데 최제우의 『용담유사』는 1860년대에 새롭게 조성된 국내외의 상황을 반영하면서 민족의 생존과 내부적 개혁을 위한 근대적 각성을 나타내었다는 점에서 근대문학 형성에서 주목할 만한 구실을 하였다. 반외세 구국을 주장하는 신문가사나 의병가사로의 길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학가사 중에서 나중에 나온 것들은 이러한 의의를 가지지 못하고, 전시대 문학의 잔존 형태로 취급되지 않을 수 없다.

『용담유사』에 수록된 가사는 1860년의 「용담가(龍潭歌)」·「안심가(安心歌)」·「교훈가(敎訓歌)」, 1861년의 「도수사(道修詞)」·「몽중노소문답가(夢中老少問答歌)」·「검결(劒訣)」, 1862년의 「권학가(勸學歌)」, 1863년의 「도덕가(道德歌)」·「흥비가(興比歌)」 등이다.

그 내용을 보면 「용담가」는 최제우가 나고 자란 고장을 자랑하는 것으로 서두를 삼았다. 득도 초기에 자기 고장과 가계를 자랑하며 거기 의미를 부여할 때의 생각을 나타낸 작품이다.

「안심가」는 가족을 포함한 자기 주위의 사람들을 안심시키고자 해서 지은 작품임을 서두에서 말하였다. 최제우가 득도하자 우선 가족이 괴이한 일이라고 하며 놀라고, 자기 마을 사람들부터가 서학을 한다는 등 험담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득도의 의미를 알리고 주위에서부터 동학을 펴는 데 우선 생기는 장애를 극복하고자 한 작품이며, 사상을 좀 더 구체화해서 나타내었다.

「교훈가」는 역시 주위의 사람들을 상대로 해서 자기 입장을 해명하면서 비방을 종식시키고자 하는 한편, 새로운 사상에 의한 교훈을 펴자고 해서 지은 작품이다.

서두에서부터 베푸는 교훈을 존중하면서 받으라고 하였는데, 그 내용에서 새로운 점을 찾는다면, 동학의 역사적 위치를 말한 것과 다가올 시절에 대한 전망을 말한 것이다.

「도수사」는 자기 고장을 떠나 유랑의 길에 오른 심정을 나타내면서, 이미 입문한 교도들이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도를 닦는 마땅한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을 당부한 내용이다. 입도하였다고 해서 바로 무슨 경지에 이르는 것은 아니니 꾸준히 힘쓰고 교훈을 저버리지 말 것을 여러모로 자세하게 일렀다.

「몽중노소문답가」는 득도의 경위와 의미를 다시 말한 내용이다. 처음에 득도를 자기 고장과 결부시키기만 하던 단계를 벗어나서, 금강산에 올라가 전국을 내려다보며 새로운 사상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으로 가상적인 무대를 설정하고, 자기 자신의 일생을 비유적으로 회상하였다.

「검결」은 특히 문제가 되는 작품이다. 칼을 휘두르면서 춤을 춘다는 노래인데, 다른 것들보다 길이는 짧지만 암시하는 바는 크다. 용천검 드는 칼로 일월을 희롱하고 우주를 덮는다고까지 하였다. 그 뜻은 무력에 의한 변혁을 꾀하자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최제우는 실제로 이 노래를 부르며 칼춤을 추는 의식을 거행하였으며, 당시 정부에서 최제우를 역적으로 몰아서 처형할 때 이 점에 가장 큰 혐의를 두었다. 그래서 최제우가 죽은 뒤에 동학교도들은 불리한 위치에서 벗어나려고 처음에는 이 작품을 『용담유사』에 넣지 않았다.

「권학가」는 최제우가 전라도에 가서 머무를 때 그 동안 겪은 풍상을 회고하고 고향생각을 하며, 동학을 열심히 공부할 것을 거듭 당부하자고 지은 노래이다.

1860년에 영·불함대가 북경을 함락시킨 사건을 언급한 대목이 처음 보인다. ‘서양적’이 중국을 침범해서 천주당을 높이 세운 것은 가소로운 일이라고 하면서도, 그러한 사태가 조선에도 닥쳐올 것을 염려하였다. 위기를 ‘괴질(怪疾)’이라고 표현하고서, 괴질을 이겨낼 방도를 제시하고자 하였다.

「도덕가」와 「흥비가」는 마지막으로 지은 작품인데, 자기를 비방하는 무리를 나무라며 그런 데 현혹되지 말고 도를 닦아야 마땅하다는 것을 말한 내용이다.

사상적인 내용은 새롭게 전개한 바가 보이지 않고, 표현이 흥미롭다. 「도덕가」의 마지막 대목에서는 두어 자 언문가사를 들은 듯이 외워 ‘정심수도(正心修道)’한 다음에 잊지 말고 생각하라고 하였다. 이 말에서 교도들에게 외우게 하려고 가사를 지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흥비가」는 말하고자 하는 이치를 비유해서 나타낸다는 뜻에서 제목을 그렇게 붙였다. 모기처럼 비방하고 헐뜯는 사람들이 있더라도, 이치도 무궁하고 나타낼 수 있는 글도 무궁하다는 말로 결말을 삼았다.

『용담유사』 이후의 동학가사는 필사본으로 전해진 것과 목판본으로 전해진 것이 있다. 필사본은 용호대사라는 사람의 「궁을가(弓乙歌)」, 이서구(李書九)의 「채지가(採芝歌)」 6편 등이 있어서 홍우(洪又)가 편찬한 『동학문명(東學文明)』에 수록되었다. 이밖에 정리되지 않은 것들도 이따금씩 보인다.

목판본은 김주희가 수집하고 자기 자신의 창작을 대폭 추가하여서 간행한 것이다. 자료 총량은 40책에 이르는데, 그 중에는 가사집이 아닌 것도 있고, 현재 발견되지 않은 것도 있다. 가사집인 것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제목을 국문으로 적은 것은 국문만으로 표기된 경우).

1922년에 지어진 『용담유사』 8편(‘검결’은 들어 있지 않다.)과 1925년에 지어진 『창덕가』 1편이 있다. 1929년의 것은 『임하유서(林下遺書)』 5편, 『경운가(警運歌)』 4편, 『논학가(論學歌)』 1편, 『연시가(年時歌)』 1편, 『경화가(警和歌)』 1편, 『춘수가(春修歌)』 6편, 『도덕가(道德歌)』 5편, 『창선가(昌善歌)』 5편, 『직분가(職分歌)』 2편, 『경세가(警世歌)』 1편이다.

1932년에 『허황가(虛荒歌)』 1편, 『신심편(信心篇)』 3편, 『창도가(昌道歌)』 8편, 『신화가(信和歌)』 2편, 『창화가(昌和歌)』 1편, 『심학가(心學歌)』 1편, 『시격권농가(時格勸農歌)』 2편, 『인선수덕가(仁善修德歌)』 1편, 『어부사(漁父辭)』 6편, 『상화대명가(相和代明歌)』 6편, 『해운가(解運歌)』 1편, 『안심치덕가(安心致德歌)』 1편, 『명찰가(明察歌)』 5편, 『몽중서(夢中書)』 3편, 『창명가(昌明歌)』 1편, 『택선수덕가(擇善修德歌)』 3편, 『송구영신가(送舊迎新歌)』 2편, 『운산시호가(運算時呼歌)』 2편, 『신실시행가(信實施行歌)』 2편, 『십승가(十勝歌)』 2편, 『지시명찰가(知時明察歌)』 1편, 『궁을가(弓乙歌)』 1편, 『불역(不易)』 3편까지가 목록의 전부이다.

이들 가사 중에서 대부분을 창작한 김주희는 최제우의 도통을 이어서 동학교를 창건하였다고 하면서 동학의 정통으로 자처하였으나, 최제우와는 사상이 다른 점이 적지 않다.

동학의 뜻을 서학과 대립된 것으로 보지 않고 오행사상에서의 동방을 상징하는 것이라고만 하였다. 한울님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한울님을 사람 위에 존재한다고 보아 이원론적 세계관을 제시하였다. 앞으로 후천개벽(後天開闢)과 함께 좋은 세상이 온다는 믿음도 약화시켰다. 그러면서 세속과는 인연을 끊고 은둔하면서 일체의 정치권력에 대해서 무저항·비타협의 자세를 지니며 종교적인 수련에만 힘썼다.

많은 가사가 대체로 이러한 사상을 나타내고 있으며, 표현에 있어서도 관념적이고 상투적인 언사를 되풀이한다. 게다가 현실적 경험과 직결되는 설득력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자료는 출간되었어도 적극적인 평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김주희는 자기의 도통을 내세우기 위해서 청림(靑林)이라는 인물이 남접도주(南接道主)로서 최제우의 뜻을 직접 이었으며, 그 맥락을 받아서 동학교를 열었다고 하였는데, 청림은 가공의 인물이다.

그러한 가공적인 신화를 만들어내서 교리를 전개하는 데에서 신비주의적 성격이 잘 드러나며, 그 점은 가사를 통해서도 거듭 나타난다.

예컨대, 『용담유사』 다음 차례로 제2권을 이루는 『임하유서』에서는 동서남북 네 방위 중에서 동쪽이 으뜸이고, 춘하추동 운행에서 수풀이 생겼으니, 청림의 도를 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발상은 일제 통치하에서 번성한 유사종교의 여러 집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형식은 거의 4·4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넉자로 된 한자어가 자주 되풀이된다. 작자의 심정을 토로하기보다는 교리를 풀이하는 데 치중한 편이어서 문학작품으로서의 의의는 그만큼 제한되어 있다.

참고문헌

『동학가사』 Ⅰ·Ⅱ(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79)
『최제우작품집』(김인환, 형설출판사, 1978)
『문학과 문학사상』(김인환, 열화당, 1978)
『동학문명』(홍우, 일조각, 1977)
『개화기의 우국문학』(조동일 외, 신구문화사, 1974)
「새로 찾은 동학노래의 사상적 맥락」(하형래, 『문학사상』 5, 1975)
관련 미디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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