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술

  • 역사
  • 인물
  • 조선 후기
조선 후기에, 성균관장의를 역임하였으며, 신임사화 때 소론의 탄핵으로 처형된 유생.
이칭
  • 노팽(老彭)
  • 북정(北汀)
  • 시호정민(正愍)
인물/전통 인물
  • 본관칠원(漆原, 지금의 경상남도 함안)
  • 사망 연도1721년(경종 1)
  • 성별남성
  • 주요 관직문화현령
  • 출생 연도1697년(숙종 23)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김창수 (동국대학교, 한국사)
  • 최종수정 2023년 02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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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성균관장의를 역임하였으며, 신임사화 때 소론의 탄핵으로 처형된 유생.

개설

본관은 칠원(漆原). 자는 노팽(老彭), 호는 북정(北汀). 상호군(上護軍) 윤수(尹秀)의 후손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15년(숙종 41) 유계(兪棨)의 저서인 『가례원류(家禮源流)』의 서문을 쓴 노론의 권상하(權尙夏)가 소론의 유규(柳奎) 등 800여 명의 상소로 삭직되자 성균관의 유생으로서 『가례원류』 시비의 전말을 논하여 권상하의 신구(伸救)를 상소하였다.

1720년(경종 즉위년) 성균관장의(成均館掌議)로서 이이명(李頤命)이 편찬한 숙종의 지문(誌文)이 또한 편파적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상소하고, 유생들을 선동하여 권당(捲堂: 동맹휴학)하였다. 이듬해 신임옥사에 김일경(金一鏡) 등 소론의 탄핵으로 사형되었다.

당시 윤봉구(尹鳳九)가 문화현령으로 있으면서 윤지술의 죽음 소식을 듣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전(傳)에 연고 없이 선비를 죽이면 사대부는 자리를 떠나야 한다고 하였는데 나는 사대부는 못 되지만 떠나야 하겠다.” 하고 벼슬을 버리고 집에 돌아갔다고 한다.

윤지술·임창(任敞)·이의연(李義淵)을 가리켜 신임(辛壬)의 삼포의(三布衣)라고 불렀다. 1725년(영조 1) 노론이 집권하자 신원되고, 1802년(순조 2) 사현사(四賢祠)에 제향되었다. 1841년(헌종 7)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정민(正愍)이다.

참고문헌

  • - 『숙종실록(肅宗實錄)』

  • - 『경종실록(景宗實錄)』

  • - 『영조실록(英祖實錄)』

  • - 『속조야집요(續朝野輯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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