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칠원(漆原). 자는 노팽(老彭), 호는 북정(北汀). 상호군(上護軍) 윤수(尹秀)의 후손이다.
1715년(숙종 41) 유계(兪棨)의 저서인 『가례원류(家禮源流)』의 서문을 쓴 노론의 권상하(權尙夏)가 소론의 유규(柳奎) 등 800여 명의 상소로 삭직되자 성균관의 유생으로서 『가례원류』 시비의 전말을 논하여 권상하의 신구(伸救)를 상소하였다.
1720년(경종 즉위년) 성균관장의(成均館掌議)로서 이이명(李頤命)이 편찬한 숙종의 지문(誌文)이 또한 편파적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상소하고, 유생들을 선동하여 권당(捲堂: 동맹휴학)하였다. 이듬해 신임옥사에 김일경(金一鏡) 등 소론의 탄핵으로 사형되었다.
당시 윤봉구(尹鳳九)가 문화현령으로 있으면서 윤지술의 죽음 소식을 듣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전(傳)에 연고 없이 선비를 죽이면 사대부는 자리를 떠나야 한다고 하였는데 나는 사대부는 못 되지만 떠나야 하겠다.” 하고 벼슬을 버리고 집에 돌아갔다고 한다.
윤지술·임창(任敞)·이의연(李義淵)을 가리켜 신임(辛壬)의 삼포의(三布衣)라고 불렀다. 1725년(영조 1) 노론이 집권하자 신원되고, 1802년(순조 2) 사현사(四賢祠)에 제향되었다. 1841년(헌종 7)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정민(正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