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술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성균관장의를 역임하였으며, 신임사화 때 소론의 탄핵으로 처형된 유생.
이칭
노팽(老彭)
북정(北汀)
시호
정민(正愍)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97년(숙종 23)
사망 연도
1721년(경종 1)
본관
칠원(漆原, 지금의 경상남도 함안)
주요 관직
문화현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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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성균관장의를 역임하였으며, 신임사화 때 소론의 탄핵으로 처형된 유생.
개설

본관은 칠원(漆原). 자는 노팽(老彭), 호는 북정(北汀). 상호군(上護軍) 윤수(尹秀)의 후손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15년(숙종 41) 유계(兪棨)의 저서인 『가례원류(家禮源流)』의 서문을 쓴 노론의 권상하(權尙夏)가 소론의 유규(柳奎) 등 800여 명의 상소로 삭직되자 성균관의 유생으로서 『가례원류』 시비의 전말을 논하여 권상하의 신구(伸救)를 상소하였다.

1720년(경종 즉위년) 성균관장의(成均館掌議)로서 이이명(李頤命)이 편찬한 숙종의 지문(誌文)이 또한 편파적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상소하고, 유생들을 선동하여 권당(捲堂: 동맹휴학)하였다. 이듬해 신임옥사에 김일경(金一鏡) 등 소론의 탄핵으로 사형되었다.

당시 윤봉구(尹鳳九)가 문화현령으로 있으면서 윤지술의 죽음 소식을 듣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전(傳)에 연고 없이 선비를 죽이면 사대부는 자리를 떠나야 한다고 하였는데 나는 사대부는 못 되지만 떠나야 하겠다.” 하고 벼슬을 버리고 집에 돌아갔다고 한다.

윤지술·임창(任敞)·이의연(李義淵)을 가리켜 신임(辛壬)의 삼포의(三布衣)라고 불렀다. 1725년(영조 1) 노론이 집권하자 신원되고, 1802년(순조 2) 사현사(四賢祠)에 제향되었다. 1841년(헌종 7)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정민(正愍)이다.

참고문헌

『숙종실록(肅宗實錄)』
『경종실록(景宗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속조야집요(續朝野輯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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