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동학의 교단조직에서 유래된 것으로, 각 고을마다 설치한 접(接)의 수령(守令)인 접주를 집강(執綱)이라고 한 데서 유래되었다.
동학농민군이 전라도 일대를 휩쓸고 있을 무렵 각 지역의 치안 질서와 지방 행정은 거의 마비 상태에 놓여 이를 회복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이에 전라도관찰사 김학진(金鶴鎭)은 6월에 동도대장 전봉준(全琫準)을 감영으로 불러, 관민의 협력을 통해 타개책을 강구, 동학교도의 서정 협력과 관찰사와 관민의 화합을 위해 각 군(郡)에 집강을 두기로 허락받았다.
집강소는 전라도 53주읍(州邑)의 관아 안에 설치되었고, 동학교도가 각 고을(邑)의 집강이 되어 지방의 치안질서는 그들에 의해 유지되기에 이르렀다. 집강소의 장(長)에는 집강 1인을 두고, 지방의 행정기관과 같은 분장 아래 서기·성찰(省察)·집사(執事)·동몽(童蒙) 등의 임원을 두어 행정사무를 맡아 보게 하였다. 군수나 현령·현감은 이름뿐으로 형식상 자리에 지나지 않았으며, 서리들은 모두 동학에 입적해야만 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다.
전주에는 집강소의 총본부인 대도소(大都所)를 두어 전봉준이 수천 명의 동학교도들을 거느리고 금구(金溝)·원평(院坪) 등지를 근거로 하여 전라우도를 호령하였고, 김개남(金開南)은 수만의 동학교도를 거느리고 남원을 근거로 하여 전라좌도를 호령하였다.
집강소가 전라도 각 고을에 설치될 때, 고을에 따라서는 수령이 반발해 설치를 허용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는데, 나주·남원·운봉의 경우가 특히 그러하였다. 대도소에서는 이와 같은 고을에 대해 처음에는 격문을 보내 설득하다, 뒤에는 최경선(崔景善)·김개남·김봉득(金鳳得) 등에게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각기 나주·남원·운봉으로 가서 수령을 무력으로 위협, 계획을 강행하도록 하였다.
이에 나주목사는 읍내의 민정(民丁)까지 모집, 동원하여 최경선이 이끄는 3,000명의 동학농민군에 대항하여 끝까지 성을 지키려고 하였다. 이렇게 되자 전봉준은 최경선으로 하여금 부대를 철수시키게 한 뒤 몇 명의 부하만을 거느리고 나주목사를 찾아가 담판하였다. 위기에 처해 있는 국내외 정세, 전주화약의 내용, 집강소 설치의 연유 등을 설명, 설득시키는 데 성공하여 나주에도 집강소를 설치하였다.
남원에서는 김개남이 이끄는 3,000명의 동학농민군이 남원성을 공격, 함락시키고 부사 김용헌(金龍憲)을 잡아 목을 매달았다. 운봉도·김봉득의 계략으로 쉽게 함락시킴으로써 각각 집강소를 설치하게 되었다. 집강소에서는 치안과 행정을 담당하였고, 동학농민군은 이곳을 통해 폐정개혁을 추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