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문화(文化). 유량(柳亮)의 후손으로 유종근(柳種根)의 아들이다. 충청북도 충주 출생으로, 본명은 유흥식(柳興湜), 호는 우근(友槿)이며, 본명보다 ‘유자명’이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19년 3·1운동 당시 충주 간이농업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학생 중심의 시위를 준비하다가 일본 경찰에 사전 탐지되자 중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충청도 대표의원으로 선출되고, 나석주(羅錫疇)의 소개로 김원봉(金元鳳)의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의열단장 김원봉의 비밀참모로 국내외 일본인과 친일파 처단활동에 성과를 올렸다.
1927년 중국 난징에서 김규식(金奎植), 중국인 목광록(睦光錄), 인도인 간다싱 등과 함께 일본에 대한 아시아 피압박민족의 공동투쟁을 강화할 목적으로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를 조직하였다. 이념적으로 무정부주의를 견지하여 1927년 조선혁명자연맹 간부로 활동하며 무창(武昌) 입달학원(立達學院)에서 강의했고, 1930년 상해 강만(江灣)의 농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장도선(張道善) 등과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결성했다. 1931년 무정부주의자인 유기석(柳基石) 등과 불멸구락부(不滅俱樂部)를 조직해 활동했다.
1936년 중국군과 협력해 전시공작대의 일원으로 활동했고, 이어 무정부주의자 훈련소인 민단훈련소의 참모 이우관(李又觀) 등과 무정부주의자연맹 상해부(上海部)를 조직해 주중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의 처단을 시도하였다.
1942년 약헌개정기초위원, 1943년 3월 대한민국임시정부 학무부 차장을 지냈고, 해방 이전까지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했다. 한편 중국 국민당(國民黨)의 거물급 인사와도 꾸준히 교류하며 항일독립운동 연합전선을 펴나갔다.
1945년 해방 이후 귀국하지 못하고 중국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에서 대학교수 생활을 했다. 윈난[雲南]고원지대에서 최초로 특수벼 재배에 성공하여 농학박사가 되었고, 특히 독립운동가 출신 원예학자로 중국인들의 신망이 두터웠다. 만년에는 후난농업대학 원예학과 명예주임으로, 중국 원예학회 명예이사장에 추대되었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