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명중(明仲). 밀직부사 유인기(柳仁琦)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도사사(版圖司事) 유보발(柳甫發)이다. 아버지는 고려 밀직사(密直使) 유계조(柳繼祖)이며, 어머니는 면성군(沔城君) 구영검(具榮儉)의 딸이다.
1381년(우왕 7) 생원이 되고, 이듬해 문과에 급제, 전의부령(典儀副令)을 거쳐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가 되었다. 1388년(우왕 14) 전라도안렴사(全羅道按廉使)가 되고, 1390년(공양왕 2) 형조판서가 되었다. 1392년 이조전서(吏曹典書)로 있을 때, 조선의 개국에 협력한 공으로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록되고, 이듬해 중추원부사를 역임하였다.
1397년(태조 6) 계림부윤(鷄林府尹)으로 부임하였으며, 다음해 왜구가 침입해오자, 이에 맞서 싸워 크게 무찔렀다. 형세가 불리해진 왜구들이 항복을 청해오자 항복을 받아들인 뒤 한꺼번에 섬멸하려는 전략을 세웠으나, 계획이 누설되어 왜구들이 도망쳐버렸다.
그 죄로 합산(合山)에 유배되었다가, 1398년 나주로 옮겨졌으나 곧 풀려났다. 그 뒤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로 있다가 1400년(정종 2) 이방간(李芳幹)의 난을 평정하는 데 협력한 공으로, 1401년(태종 1)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에 책록되었다.
1402년 문성군(文城君)으로 봉작되었고, 그 해 동북면순문사(東北面巡問使)가 되어 변방을 살피고 돌아왔다. 1404년에 대사헌에 이어 형조판서가 되었으며, 예문관대제학도 겸하였다. 그 뒤 판한성부사·이조판서를 거쳐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에 올랐으며,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1413년 문성부원군(文城府院君)으로 진봉되었다가 1415년 우의정으로 승진되었다. 조선의 창건에서 제도 확립에 크게 기여한 명신 중의 한 사람이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