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형지(詗之). 강안수(姜安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강휘(姜徽)이고, 아버지는 관찰사 강자평(姜子平)이며, 어머니는 의성군(誼城君) 이채(李寀)의 딸이다.
1490년(성종 21)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언(正言)으로 등용되고, 1493년에 지평(持平)이 되었다.
1495년(연산군 1)에 장령(掌令)이 되고 그뒤 벼슬이 누진되어, 1504년에 대사간이 되었다. 같은 해에 일어난 갑자사화 때에 연산군이 생모인 폐비 윤씨를 왕후로 복위하고 신주를 묘(廟)에 안치하려는 데 반대하다가 그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사위인 허반(許磐)과 함께 능지처참되었다.
아우인 군수 강겸(姜謙)도 형의 죄에 연좌되어 북쪽 변방에 유배되었다가 죽었다. 천성이 너그럽고 공평하고 후하였으나, 올바른 일에는 소신을 굽히지 않는 강직한 선비였다. 아내 김씨는 한달 동안 먹지 않고 슬피 울다가 죽으니, 1507년(중종 2)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중종 초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