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 대토벌 작전 ( )

근대사
사건
대한제국기 일제가 국내의 의병세력을 완전히 진압하기 위해 펼친 군사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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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남한폭도 대토벌작전은 대한제국기 일제가 국내의 의병세력을 완전히 진압하기 위해 펼친 군사작전이다. 호남지역은 반일의식이 강하여 의병운동이 특히 활발한 곳이었다. 1909년 통계를 보면 호남지역의 전투의병 수가 전체의 과반을 넘었다. 일제는 호남지역 의병을 완전히 진압하지 않고서는 의병 소탕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이 지역에서 대규모 군사작전을 진행했다. 그 결과 의병 1만 7,779명이 사망하고, 부상자가 376명, 포로가 2,139명 나왔다. 이 작전 후 근거지를 상실한 의병세력은 만주·연해주 등지로 이동하여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하였다.

정의
대한제국기 일제가 국내의 의병세력을 완전히 진압하기 위해 펼친 군사작전.
개설

일제는 국내에서 활동하는 의병세력을 완전히 진압할 목적으로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 30일까지 2개월에 걸쳐 의병세력의 주요 근거지인 전라남도 및 그 외곽지대에 일본군 등을 배치하여 초토화 작전을 펼쳤다. 이로 인해 근거지를 상실한 국내 의병세력은 중국 만주 및 러시아 연해주 등지로 이동하게 되었다.

역사적 배경

1907년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으로 해산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함에 따라 의병의 조직과 역량이 더욱 강화되었다. 의병의 활동지역은 충북과 강원도 접경지역을 넘어 1908년에는 지리산 서쪽의 호남지역으로 확대되었다.

1908년 전라도의 전투 횟수는 전국 대비 25%였고, 전투의병수는 25%를 차지했다. 1909년에는 이런 상황이 더욱 심화되어 1909년 상반기 전투횟수가 47.3%, 전투의병수가 50.1%라는 높은 비중을 차지하였다.

일제의 추산에 의하면 ‘남한대토벌작전’ 직전 호남지역의 의병은 의병장 약 50명을 포함하여 약 4,000여 명에 달했다. 이처럼 호남지역에서 의병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것은 이곳이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본거지로서 반일의식이 강했을 뿐만 아니라 1904년 러일전쟁을 전후로 하여 일본인에 의한 토지 침탈, 경제적 수탈이 극심하여 반일의식이 고조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제는 호남지역의 의병을 완전히 진압하지 않고서는 의병세력을 완전히 소탕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이 지역에 대규모 군사작전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경과

본래 이 계획은 9월 1일부터 10월 10일까지 실시하기로 했으나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0월 30일까지 연장되었다. 작전의 주도세력은 대구에 있던 한국 임시파견대 사령부가 주도하고, 보병 2개 연대 및 관할지역 경찰과 헌병보조원 등이 합동작전으로 벌였으며, 해안봉쇄를 위해 수뢰정 4정도 파견되었다.

작전의 골자는 다음 세 가지였다. 첫째, 작전구역은 전라남북도의 내륙과 연안도서였다. 둘째, 전라남북도를 3구역으로 구분하여 3기로 나누어 순차적으로 작전을 수행하되 북쪽에서 남쪽으로 진행하면서 의병을 퇴로를 차단키로 하였다. 셋째, 작전지구는 전라남북도를 좌우로 나누어 서북의 좌측 지구는 보병 제1연대가 맡고, 남동의 우측 지구는 제2연대가 맡아 밀집 수색하기로 했다.

일제는 2,000여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3단계에 걸친 작전으로 이 지역 의병을 진압하기 시작했다. 제1단계 작전은 남원을 기점으로 고흥 · 광주 · 영광으로 이어지는 지대였고, 제2단계는 고흥 · 광주 · 영광 근방을 기점으로 남서해안에 이르는 지대였으며, 제3단계는 도서지방으로 탈출한 의병을 섬멸하기 위해 무인도 지역까지를 대상으로 한 초토화 작전이었다.

일제는 촌락을 포위하고 면장과 동장을 불러 미리 조사해둔 남자 명부나 민적(民籍) 등에 기록된 남자를 일일이 대조하고 의심스러운 자는 단서를 추적하였으며, 사람들을 서로 다른 장소에서 심문하기도 했다.

또한 한 번 수색한 마을을 불시에 다시 수색함으로써 토벌대를 피해 숨었다가 다시 나타나는 의병까지 샅샅이 뒤져 체포, 처형했다. 특히 의병과 관계가 깊은 마을의 경우에는 수십 회의 수색을 거듭했다.

결과

당시 전남경찰서의 보고에 의하면, 1909년 8월 25일부터 10월 21일까지 이 작전으로 사망한 전라남도 권역 의병은 420명, 체포자 또는 자수자는 1,687명이었다. 특히 심남일(沈南一), 안규홍(安圭洪) 등 약 26명의 주요 의병장이 체포되었고, 이들을 포함해 체포된 의병 대다수가 현장이나 감옥에서 처형당했다. 이 기간 동안 희생된 의병장만도 103명에 달하였다.

이때 일본군에 잡힌 의병들은 강제노동을 당하기도 했는데, 그 대표적 경우가 해남에서 장흥 · 보성 · 낙안 · 순천을 경유하는 광양 · 하동까지의 도로작업이었다. 그래서 일제는 이 도로를 ‘폭도도로(暴徒道路)’라고 불렀다.

남한대토벌작전 전체 기간 중 양측의 피해규모를 살펴보면, 토벌대측은 사망자가 136명, 부상자 277명이었던 반면, 의병측은 사망자가 17,779명, 부상자가 376명, 포로가 2,139명이었다. 이 작전 이후 근거지를 상실한 의병세력은 만주 · 연해주 등지로 이동하여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하게 된다.

의의와 평가

대한제국기에 일제가 반일운동세력에 대해 벌인 최대 규모의 군사작전이었다. 이 작전에는 최대 규모의 군 병력이 동원되었을 뿐만 아니라 경찰, 헌병 및 면장과 이장 등 지방 말단 행정기관까지 총동원되었다.

일제는 일정한 지역을 밀집 수색하고 수색지역을 내륙을 물론 해안지역까지 확대함에 따라 호남지역 의병세력은 거의 진압되기에 이르렀다. 의병세력은 국내 활동이 어려워지자 만주, 러시아 등 국외로 이동하였고, 독립군으로 전환하였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1970)
「호남의병에 대한 일본 군·헌병의 탄압작전」(신주백, 『역사교육』87, 2003)
「의병학살의 참상과 남한대토벌」(홍순권, 『역사비평』45, 1998)
집필자
서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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