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기는 전통적 질서와 가치관이 잔존하는 가운데 새로운 근대사회를 향한 움직임이 본격화한 과도기이다. 을미사변 후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에 1년 정도 머물다가 1897년 2월 20일에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돌아온 고종은 국가적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근대적 주권 국가로서 대한제국 선포를 준비하였다.
대한제국 선포는 중국 중심의 전통적 동아시아 국제 질서 관념으로 보면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다. 원래 제국(帝國)의 군주를 의미하는 황제라는 칭호는 많은 나라들을 복속시키는 군주가 되고 나서야 사용할 수 있는 칭호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이미 ‘제국’을 칭하였듯이, 대한제국도 근대 국제사회에서 대등한 주권 국가로서 활동하려는 의지를 황제국 선포로 천명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농상공부 협판 권재형, 외부 협판 유기환, 전 군수 정교 등의 칭제(稱帝) 논리는 대부분 자주독립 국가에서 스스로 존호(尊號)할 수 있고, 존호를 통해 국가의 위신을 높여 자강(自强)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유럽 제국과 평등한 외교를 펼치는 데는 동양사회에서만 통하는 ‘제(帝)’와 ‘왕(王)’의 구별이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주장, 만국공법에 의하면 자주국은 스스로 존호할 수 있고 타국이 그것을 승인할 권리는 없다는 국제법에 근거한 주장도 등장하였다.
김재현 등 716명의 연명 상소에서는 우리나라가 삼한의 땅을 통합하여 영토가 4,000리이고 인구도 2000만에 달하니 큰 나라라는 점을 강조하였고, 의정부 의정 심순택과 궁내부(宮內府) 특진관 조병세 등 백관의 연명 상소, 지방의 유학(幼學), 성균관 유생, 시전 상인들의 상소가 이어졌다. 최익현, 유인석 등 보수적인 정통 성리학자들의 반대를 제외하면, 칭제를 통해 ‘자주’와 ‘자강’을 달성할 수 있다는 논리가 대한제국 출범의 배경이 되었다.
황제국 선포에 앞서 8월 14일, 새 연호가 ‘ 광무(光武)’로 제정되었고, 8월 16일부터 사용되었다. 10월 11일에는 새 국호가 ‘대한(大韓)’으로 결정되었다. ‘대한’이라는 국호가 선택된 이유로 고종은 삼한의 땅을 하나로 통합한 것, 다른 나라 사람들이 이미 ‘한(韓)’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는 점을 들었고, 의정 심순택은 ‘조선’은 옛날에 기자(箕子)가 중국에서 받은 국호이므로 당당한 황제국이 그 호칭을 계승함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중국에 대한 오랜 사대관계에서 벗어나 완전한 자주 독립, 근대적 주권 국가로서의 지향이 새 국호에 담긴 뜻이라고 볼 수 있다.
10월 12일 새벽, 옛 남별궁 터, 즉 중국 사신을 접대하던 자리에 쌓은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10월 13일 공식적으로 대한제국 출범을 선포하였다. 대한제국 선포에 대한 열강의 반응은 대체로 주권 국가로서 실제적인 자주와 독립을 인정하지 않거나 소극적으로 승인하는 태도였다.
하지만 즉위식 전날 오후 제사 준비를 위하여 환구단에 행차하는 황제 일행의 모습을 보도한 『 독립신문』 기사와 같이, 태극 국기를 앞세우고 황룡포에 면류관을 쓴 황제와 그를 따르는 황태자, 관료, 군인들의 행렬을 보면서 집집마다 태극기를 높이 걸고 색등불을 환하게 달아 놓은 거리의 표정은 오래만에 새 시대의 시작을 경축하는 밝은 분위기였다. 대한제국기에 태극기는 국가를 상징하는 공식 표상으로서 관청은 물론이고 민가에서도 국경일이나 행사 때마다 게양하여 충군애국주의의 상징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대한제국 선포 후에도 한동안 황제권에 도전하는 정치세력들이 잇달아 등장하였다. 원래 고위 관료들의 사교 클럽으로 출발한 독립협회는 러시아의 이권 침탈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다가 1898년부터 본격적인 반정부 투쟁에 돌입하였다. 만민공동회와 함께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요구에 반대하고, 군사교관 및 재정고문 철수를 요구하였을 뿐 아니라 보수적인 정부 대신들과 고종 황제 및 측근 세력의 독단적인 정국 운영을 비판하는 집회를 열었다.
독립협회 · 만민공동회의 반정부 투쟁은 점차 정치 참여 기회의 확대를 요구하는 참정권 운동으로 발전하였으며 의회를 설립하여 국정의 중요 사항과 외국과의 조약에 동의를 얻을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정부와 독립협회는 갑오개혁 때 실직이 없는 관료들의 대기처로 설치된 중추원을 의회로 개편하는 관제 개정에 합의하고, 중추원 의관 50명 가운데 반수인 25명을 인민협회에서 투표로 선출하게 하였다. 하지만 곧바로 고종 황제를 폐위하고 박정양을 대통령, 윤치호를 부통령으로 하는 공화제를 수립할 것이라는 익명서 사건을 계기로 독립협회 간부 체포령과 민회 해산령이 내려짐으로써 독립협회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독립협회를 해산한 후 고종은 대한제국의 정치체제가 전제 군주제임을 확실히 하였다. 1899년 8월 17일 공포된 「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는 대한제국의 정치와 군권(君權)의 소재를 명백히 밝히는 국제(國制)를 제정하라는 조칙에 따라 법규교정소에서 작성하였고, 황제의 재가를 받아 반포하였다.
총 9조로 이루어진 「대한국국제」는 제1조에서 대한국(大韓國)은 세계 만국이 공인하는 자주 독립의 제국(帝國)이라고 선언하여 근대 주권 국가로서 위상을 분명히 하였고, 나머지 조항들은 500년 전래 만세불변의 전제 군주로서 황제권의 내용을 공법(公法)에 의거하여 구체적으로 명시한 것이다. 즉 ① 신민(臣民)의 군권(君權) 침손(侵損) 행위에 대한 처벌, ② 육 · 해군의 통솔과 편제, ③ 법률의 제정 · 반포 · 개정과 사면 · 복권의 명령, ④ 행정 각부 관제의 제정과 관료의 임면, ⑤ 외국과의 조약 체결, 사신 파견, 선전 포고 · 강화의 권리 등을 황제의 권한으로 명시하였다.
인민의 권리와 의무에 대한 규정이 없고, 의회 개설이나 삼권 분립에 관한 조항이 없으며, 황제에게 입법 · 사법 · 행정 · 외교 · 군통수권 등 모든 권한이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아무런 명문화된 규정조차 필요하지 않던 왕조시대의 왕권에 비해 황제권이 법적 근거를 가져야 함을 명시하였다는 데 의의가 있다.
사실 「대한국국제」 제정 이전에도 황제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한 각종 조치가 추진되고 있었다. 1898년 6월 29일 황제의 육해군 친총(親總)을 천명한 후, 육군 증설과 해군정제(定制)에 관한 조칙이 내려지고 친위대 편제를 개정하는 등 일련의 군비 강화 작업이 시작되었다.
군비 증강 사업은 국방력 강화뿐 아니라 대내적으로 황제권에 도전하는 세력을 제압하고 친위 세력을 보강하려는 의도로 추진되었으며, 1899년 6월 창설된 원수부(元帥府)가 그 중심이 되었다. 원수부 산하 군무국, 검사국, 회계국, 기록국 등 각국 총장에는 대부분 황제의 측근 인물들이 임명되었다. 계속적인 군비 증강으로 정부의 재정 지출 가운데 군부 예산이 전체의 40%에 육박할 정도였고, 1903년 3월에는 17세 이상 40세 이하의 장정을 모집하는 「징병조례」도 반포되었으나 실행은 하지 못한 채 러일전쟁이 발발하였다.
한편 대한제국기에는 충군애국주의를 고취하기 위하여 다양한 국가적 상징 매체가 활용되었다. 황제 탄신일( 만수성절), 황태자 탄신일(천추경절), 황제 즉위일( 계천기원절), 태조 고황제(高皇帝) 등극일(개국기원절)을 국경일로 지정하고, 국경일에는 관청과 학교, 민가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경축 행사를 열게 하였다. 황제의 어진(御眞)이나 사진도 게시용으로 보급되었다. 황실의 위상을 강화하고 황제권 중심으로 국민적 구심점을 만들어가려는 시도였다. 국가적 상징물의 제정과 활용은 근대 국민 국가 형성 과정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대한제국도 왕조시대와는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근대 국민 국가의 외형을 나타내고 있었다.
1901년 2월에는 독일인 에케르트(Franz von Eckert)가 군악대 지휘자 겸 음악교사로 초빙되어, 1902년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國歌)를 작곡하였다. 1월 27일, 충성심과 애국심을 진작하기 위하여 국가를 지어 바치라는 황제의 명령에 따라 가사가 지어졌고, 에케르트가 서양식 음계와 리듬을 사용하여 대한제국 애국가를 작곡하였다. 화려한 관악기 편성과 함께 무궁화와 태극으로 표지를 장식한 대한제국 애국가 악보집은 각국 공사관과 각급 학교에 배포되었고, 국경일이나 기타 경축 행사 때 연주되어 충군애국지심을 고취하였다.
그 밖에도 황실을 상징하는 오얏꽃 문양이 공식화되고 우표나 화폐의 도안, 훈장에도 국가를 상징하는 시각 이미지로 사용되었다. 1900년 4월 반포된 「 훈장조례」에 따르면 공훈에 따라 금척대훈장(金尺大勳章), 이화대훈장(李花大勳章), 태극장(太極章), 자응장(紫鹰章) 등이 수여되었다. 이후에 팔괘장(八卦章), 서성대훈장(瑞星大勳章), 서봉장(瑞鳳章)이 추가되었다.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 및 망육순(望六旬; 51세)을 기념하는 국제 행사를 위하여 금장(金章) 1,000개, 은장(銀章) 1,000개 등 기념장(記念章)도 만들었다.
즉위 40주년 기념식은 유럽 제국처럼 화려한 국제행사로 기획되었다. 1896년과 1897년, 민영환이 특사로 파견되었던 러시아 황제 대관식이나 영국 여왕 60주년 기념식과 같이 각국의 축하 사절을 초대함으로써 대한제국이 세계 각국과 대등한 지위에 있음을 알리고자 하였다. 대한제국과 조약을 체결한 나라의 국왕 또는 대통령에게 훈장을 보냈고, 독일, 벨기에, 이탈리아 황제는 답례로 각각 훈장을 보내왔다.
즉위 40주년을 축하하는 기념물로 환구단 앞에 석고(石鼓)를 건립하기 위한 모금운동이 시작되고, 지금의 세종로 네거리에 기념비를 세웠다. 이러한 국가적 기념물 조성도 황실의 권위를 높여 국민적 구심점을 형성하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대한제국기에 새롭게 황궁으로 건설된 경운궁을 중심으로 방사상 도로망이 개설되고 도로가 확장되었으며, 시민을 위한 탑골공원이 개설되는 등 도시 개조 사업도 추진되었다. 새로운 도시계획은 주미 공사관에 근무한 경험이 있는 한성판윤 이채연이 미국의 워싱턴 D.C.를 모델로 추진하였다. 전기 · 전차 · 전신 · 전화 · 철도 부설 사업도 추진되어 1899년 5월, 서대문에서 청량리 구간에 전차가 개통되었다.
황제가 내탕금을 출자한 한성전기회사는 미국인 콜부란 · 보스트윅과 합자회사(Collbran&Bostwick Company)로서 종로에 가로등도 점등되었다. 경운궁은 서구 열강의 공사관들과 서양인 거주지가 모여 있는 정동에 자리하여 근대 세계와 교류하고자 하는 대한제국의 지향을 반영하였다.
경운궁 안에는 전통 양식의 전각 외에 중명전, 구성헌, 정관헌, 돈덕전, 석조전 등 다수의 양관(洋館)이 건립되었다. 대한제국의 근대화 의지를 드러내는 양관과 전통 전각들이 병존하는 모습은 대한제국이 추구하는 ‘신구절충’의 이념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전통 양식의 중화전이 전통적 권위를 상징한다면, 새롭게 건립된 서양식 건축물들은 ‘근대’를 표상하였다.
하지만 1904년 4월의 경운궁 대화재 이후 고종이 거처하던 중명전은 을사늑약 체결 장소가 되었고, 즉위 40주년 기념식 행사를 위해 건립된 돈덕전은 1907년 고종의 강제 퇴위 후 순종 황제 즉위식 장소로 사용되었다. 가장 규모가 큰 양관인 석조전은 1900년에 건립을 시작하였으나 병합 직전인 1910년 6월에야 완공되었다. 대한제국의 근대화 의지를 담은 많은 양관들이 일제강점기에 철거되었다.
대한제국은 부국강병을 목표로 근대적 상공업 진흥 정책을 추진하였다. 먼저 전국의 토지를 측량하고 근대적인 방식으로 소유권을 확인해 주는 양전지계(量田地契) 사업은 근대화 사업 추진을 위한 재정 자금을 확보하고, 근대적 소유권 확립을 통해 자본주의 경제제도 수립의 전제를 마련하고자 한 것이다.
1898년 7월 양지아문을 설치하고 1899년 여름부터 본격적으로 양전사업을 실시한 결과 전국 토지의 약 3분의 2에 해당하는 218군(郡)에 대한 토지 측량을 완료하였다. 조세 부과 대상인 토지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하여 미국인 측량기사까지 고용하여 근대적인 토지 측량 방법을 도입하기도 하였다. 또 1901년에는 지계아문을 설치하고 토지 소유자의 소유권을 근대적인 방식으로 확인해 주는 지계를 발급해 주었다. 외국인의 토지 소유는 인정되지 않았다.
1898년 1월에는 철도와 광산에 외국인 합동을 금지한다는 규칙을 제정하고, 6월에는 외국인 자본의 침투를 방지한다는 명분 아래에 전국 43개 군의 주요 광산을 궁내부에 이속시켰다. 열강의 광산 채굴권 요구를 거부하기 위한 조치로서, 궁내부 산하에 광학국을 설치하고 근대적인 기계를 수입하여 직접 광산 개발을 시도하였다.
1900년에는 외국인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해 궁내부에 철도원을 신설하고 농상공부로부터 경인 · 경부철도 감독 사무를 이관하였다. 또 서북철도국을 설치하여 자력으로 경의 · 경원철도 부설을 시도하였다. 1902년 7월, 궁내부 평식원(平式院)에서는 전국적인 도량형 통일을 위한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일본은 도량형기 제조 고문으로 일본인을 용빙하라고 압박하는 등 대한제국의 근대화 개혁을 방해하였다.
대한제국의 상공업 진흥정책에 따라 근대적인 회사와 공장들도 다수 설립되었다. 정부가 직접 관영회사를 세우거나, 정부 관료들이 돈을 모아 투자한 회사나 은행들이 설립되었다. 종래 조그마한 공장을 운영하고 있던 수공업자들이 기계를 도입하고 규모를 키워 근대식 생산을 시작한 공장도 있었다.
객주나 여각 등 자금줄이 튼튼한 대상인들이 자본을 대고 수공업자들에게서 물품을 납품받는 형태의 기업도 생겨났다. 농기구나 일상용품을 만드는 철가공업, 요업, 유기제조업, 제지업 등 분야에서는 공장제 수공업 단계를 거쳐 좀 더 큰 규모의 공장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면 방직업이나 견직업 공장에서는 부분적이지만 근대식 직조기계를 도입한 곳도 있었다. 서울에서 대규모 자본을 가진 시전상인들이 1899년에 설립한 종로직조사에서 직조기계를 도입한 경우였다.
그 밖에 정미업, 양조업, 담배 제조업, 성냥 제조업 등 소비재 생산공장들도 생겨났다. 주로 고위 관료들이 투자한 한성은행, 대한천일은행, 대한철도주식회사, 인한윤선주식회사 등이 설립되고, 황실과 궁내부 내장원이 투지한 관영회사로서 인삼전매회사인 삼정사(蔘政社)도 출범하였다.
대규모 자본을 가진 특권 상인들은 궁내부 내장원에 납세하는 대신 특정 영업에 대한 독점권을 확보하고 소상공인들을 지배하는 경우가 많았다. 내장원과 특권 상인들에 의해 전국 각지의 소상품 생산자나 소상인에 대해 영업세, 유통세 성격의 잡세 수취가 강화되면서 민간의 불만이 확대되었다.
그런데 본격적인 자본주의 경제체제 건설을 위해서는 중앙은행 설립과 근대적인 화폐제도 실시가 시급하였으나, 본위화를 주조하지 못한 채 악화인 백동화만 남발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고종 황제의 핵심 측근인 전환국장 이용익(李容翊)이 화폐금융 개혁을 추진하면서 1901년 2월 「화폐조례」가 반포되고, 1903년 3월 「중앙은행조례」 및 「태환금권조례」가 제정되었다.
하지만 본위화 주조와 중앙은행 설립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구하지 못해 실행은 미룬 채 러일전쟁을 맞이하였다. 일제는 1905년 6월부터 화폐정리 사업이라는 미명 아래 일본 화폐를 무제한 통용시킴으로써 식민지적 화폐제도를 만들어 갔다.
대한제국의 근대화 사업은 의정부가 아닌 궁내부를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갑오개혁 때 왕권을 제한하기 위하여 왕실 업무 전담 기관으로 설치된 궁내부가 대한제국기에는 오히려 국정 운영의 핵심기구로 부상하였다.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간섭을 방지하기 위하여 의정부를 허설화하고 황제 직속의 궁내부를 확대시킨 것이다. 황제는 각 열강 세력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는 정부 대신들을 배제하고 측근 심복인 궁내관 위주로 국정을 운영하였다.
궁내부 산하에는 황실 업무와는 상관없는 각종 근대화 사업 기구들이 설치되었다. 궁내부 내장원은 황실의 사유재산 관리에 머물지 않고 막대한 규모의 재원을 관리하면서 근대화 사업에 관여하였다. 역둔토 지주 경영, 홍삼 전매 사업, 전국의 광산 개발과 경영뿐 아니라 전국 각지의 영업 · 유통 현장에서 잡세 수취를 강화하였다.
외세의 간섭을 배제한다는 명분으로 황제권을 배경으로 한 궁내부가 근대화 사업 전면에 나섰지만, 황실 재정 운영에 불투명하고 비효율적 요소가 많아 보수적인 원로대신과 개화세력 양측에게서 비판을 받았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재정 부족 문제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러일전쟁을 맞이함으로써 개혁은 중단되었다.
대한제국의 근대화 정책은 황제와 그 측근의 근왕 세력을 중심으로 추진되어 지지기반이 협소하였다. 근왕 세력들은 양반 출신이 아닌 중인층 혹은 그 이하의 신분 출신이지만 근대적인 실무 능력을 바탕으로 황제에게 발탁된 인물이 많았다.
고종은 1880년대부터 개화정책을 추진하면서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실무에 뛰어난 적응력을 보인 인물들을 중용하는 인사 정책을 쓰고 있었다. 고종은 황제권에 도전하는 개화세력이나 양반 출신 정부 대신이나 보수적인 유생들보다 이들을 신뢰하였다. 갑오 · 을미년간의 개화파 내각을 겪으면서 정부 대신들은 외세와 함께 황제권을 위협하는 세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보수적인 유생들이 주장하는 과거제도의 부활과 같은 복고주의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유교적 왕도정치 이념보다는 이용익과 같은 신흥 관료 혹은 상공업 세력의 부국강병을 통치 이데올로기로 삼았다.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와 신분제도가 폐지된 대한제국기에는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 능력이 아니라 근대적인 실무 능력이 관료 선발의 원칙이 되었다. 광무감리(鑛務監理) 출신의 이용익을 비롯하여 이근택, 이기동, 길영수, 김영준, 주석면, 이유인 등 근왕 세력들은 대부분 비양반 출신에 실무 능력을 갖춘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궁내관 중에서 근대 교육을 이수한 인물들은 주로 궁내부 시종원(侍從院)과 예식원(禮式院) 등에 소속되어 외국인과의 접견 통역이나 외교문서 번역 등을 담당하였다. 특히 고종이 중립화 외교를 본격화한 1900년 이후에는 러시아와 일본, 유럽 등을 오가며 외교 밀사로 활약하였다.
영어학교 출신의 이학균(李學均)은 러일전쟁 발발에 앞서 이용익과 함께 ‘전시중립선언’을 추진하였고, 프랑스어를 전공하고 궁내부 번역과장, 예식원 외사과장 등을 역임한 현상건(玄尙健)은 프랑스와 러시아 출장을 다녀왔다. 대한제국기에는 정부 관료들도 중하위 직급은 과거시험 대신 근대 교육을 받은 신지식층으로 바뀌고 있었다.
각종 외국어학교, 의학교, 상공학교(商工學校), 광무학교(鑛務學校) 졸업생과 외국 유학생을 관직에 채용하였고 우무학당(郵務學堂), 전무학당(電務學堂)에서 우체와 전신사업 인력을 배출하였다. 모범양잠소와 공업전습소 등 실업교육 기관에서 실무 인력을 양성하였고, 외국인 기술고문들이 다수 초빙되어 근대적인 기술교육과 사업 경영에 관여하였다. 하지만 근대화 사업의 성과가 채 나타나기도 전에 러일전쟁이 발발함으로써 모든 개혁 사업은 중단되었다.
1876년 개항 이후 1910년 일본의 식민지가 되기 전까지 근대적 외교관계를 수립한 나라는 일본, 미국,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청나라, 벨기에, 덴마크 등 11개국이다. 이 가운데 오스트리아와 덴마크를 제외한 9개국이 대한제국에 공사관 또는 영사관을 개설하였다. 1887년 서양 열강 중에서는 최초로 미국 워싱턴에 상주 외교관을 파견한 이래 대한제국기에는 러시아, 프랑스, 영국, 독일 등 유럽 각국에도 특명 전권 공사를 파견하고 상주 외교 공관을 설치하였다.
황제국 선포로 오랜 사대관계를 청산한 대한제국은 중국과도 1899년 한청통상조약 체결로 근대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1902년에는 북경에 대한제국 공사관을 개설함으로써 마침내 대등한 국제관계에 진입하였다. 국제조약 가입에도 나서 1899년 만국우편연합에 가입하고, 1903년 제네바협약 가입국이 되었다.
국제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도모한다는 명분으로 세계 각국 대표들이 모인 1899년 제1차 헤이그 평화회의에는 참여하지 못하였지만, 1902년 2월, 가입 신청서를 내고 일본의 국권 침탈에 대비하려 하였다. 1900년 파리 박람회 참여도 단지 한국 물품을 유럽에 소개한다는 의미를 넘어서 장차 국제사회의 외교적 지원을 기대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고종은 파리 박람회가 끝난 뒤 주프랑스 공사 민영찬에게 대한제국의 중립국화 방안을 프랑스와 상의하게 하였다. 프랑스는 대한제국의 파리 박람회 참여를 지원하였을 뿐 아니라 법률고문 크레마지(Crémazy)를 비롯하여 다수의 철도, 광산 기술자를 파견한 나라였다.
대한제국은 한반도와 만주를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의 대립이 일본의 국권 침탈로 이어질 것을 경계하면서 러시아와 미국을 상대로 계속 지원과 중재를 요청하였다. 하지만 미국은 불개입주의로 대한제국의 호소를 외면하였고 러시아의 입장은 일본과의 협상 결과에 따라 유동적이었다.
대한제국은 열강이 보장하는 중립국화를 최선의 방책으로 생각하고, 유럽의 소국으로서 중립국인 벨기에와 1901년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고종 황제는 벨기에 국왕에게 대한제국의 중립국화를 지지해 줄 것을 요청하는 친서를 보냈고 벨기에인 외교 고문도 초빙하였다.
러일전쟁 발발 직전인 1904년 1월 21일, 대한제국은 중국 산둥반도의 즈푸〔芝罘〕에서 전 세계를 향해 전시 중립 선언을 타전하였다. 러시아와 일본 간의 평화가 결렬될 경우 대한제국은 엄정 중립을 지키겠다는 것으로, 프랑스어로 세계 각국에 동시 타전되었다.
이 선언은 고종 황제의 심복인 이용익의 지휘로 현상건, 강석호, 이학균, 이인영 등 궁내관들이 프랑스어 교사 에밀 마르텔(Emile Martel)과 벨기에인 고문 델꼬이느(Delcoigne)의 협조를 받아 작성하였다고 알려졌다. 중립선언문을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은 주한 프랑스 공사관의 퐁트네(Fontenay)였고, 외부(外部) 번역관 이건춘을 즈푸 주재 프랑스 부영사에게 밀사로 파견하여 타전하게 하였다.
대한제국의 전시 중립 선언에 대해 영국을 필두로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덴마크, 청나라 정부가 회신을 보내왔다. 전쟁 당사국인 러시아와 일본, 그리고 미국은 회답하지 않았다. 일본은 대한제국의 전시 중립 선언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와 개전과 동시에 한반도에 군사를 파병하여 불법적으로 군사적 강점을 진행하였다. 이는 국제법을 위반한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7월에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 8월에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 9월에 러시아와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맺고 대한제국에 대한 보호국화를 추진하였다. 미국의 루즈벨트(T. Roosevelt) 대통령은 러시아와 일본을 미국으로 불러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중재한 공로로 1906년 미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일본은 1905년 11월, 천황의 특사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파견하여 보호조약 체결을 강요하였다. 11월 17일 밤, 고종 황제는 끝까지 조약 체결을 거부하였으나, 일본은 정부 대신들을 협박하여 18일 새벽, 보호조약(소위 을사늑약) 체결을 선포하였다. 을사늑약은 일본군의 포위 속에 협박으로 이루어졌고 황제의 동의나 비준 절차가 없으므로 국제법상 무효 요건에 해당하나, 일본은 서둘러 국제사회에 조약을 공포하고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고종 황제는 미국과 러시아에 특사를 파견하고 친서를 보내 중재와 지원을 호소하였다. 보호조약이 강압적으로 체결되었으므로 국제법적으로 무효라고 주장하였으나 열강은 이를 외면하였다. 주한 미국 공사였던 알렌(Horace N. Allen)을 통해 미국과 열강이 공동으로 한반도 문제에 대해 개입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미국은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고종의 신임을 받았던 미국인 선교사이자 교육자 헐버트(Homer Hulbert)를 통해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 · 헝가리, 이탈리아, 벨기에, 중국 등 9개국 원수에게 친서를 전달하고, 헤이그 상설 중재재판소에 제소하려는 계획도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고종은 마지막 노력으로 1907년 제2차 헤이그 평화회의에 특사단을 파견하였다. 이상설, 이준, 이위종 등 평화회의 특사단은 러시아를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하였지만, 세계 44개국이 모인 평화회의의 공식 석상에는 참여할 수 없었다. 다만 평화회의에 모인 전 세계 언론을 향해 일본의 불법적인 국권 침탈 행위를 폭로하고 대한제국의 독립 지지를 호소하였다.
하지만 국제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방안을 의논하기 위하여 모였다는 열강은 대한제국 문제를 외면하였다. 대한제국이 근대적 주권 국가로서 미국과 유럽 각국에 개설한 공사관은 을사늑약 이전부터 이미 일제에 의해 철수되었고, 을사늑약 이후 각국 공사들도 대한제국을 떠나갔다. 열강은 일본의 불법적인 외교권 박탈에 항의하지 않고 대한제국의 보호국화를 인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일본은 러일전쟁 발발과 동시에 한반도에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고 1904년 2월 23일 ‘ 한일의정서’ 체결을 강제하였다. 일본이 한반도 안에서 군사 전략상 필요한 지점을 임의로 수용할 수 있다는 조항을 만들어 군사적 강점을 시행하고, 나아가 ‘시정 개선’을 명분으로 내정간섭을 추진하기 위한 조치였다.
8월 22일에는 ‘한일 외국인고문 초빙에 관한 협정서’를 체결하고, 재정고문으로 일본인 메카다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와 미국인 외교고문 스티븐스(D. W. Stevens)를 파견하였다. 그 밖에 궁내부고문, 경무고문, 법부고문, 군부고문, 학정(學政) 참여관, 광산고문을 비롯하여 보좌관, 교관 등의 명목으로 수많은 일본인 고문들을 파견하여 대한제국의 내정 장악을 추진하였다.
을사늑약 직후인 1905년 11월 22일에는 통감부 설치에 관한 일본 칙령을 공포하고, 12월 20일 통감부관제를 제정하였다. 초대 통감에 이토 히로부미를 임명하고, 통감부는 1906년 2월 1일 공식적으로 업무를 시작하였다. 통감부 설치 이후에도 고종은 궁내부를 중심으로 황제권 행사를 계속하였으나, 이토와 이완용 내각은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 파견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7월 16일 내각회의에서 황제 폐위를 결정한 이완용과 송병준 등 친일내각은 고종의 완강한 거부에도 불구하고 7월 18일 오후5시부터 새벽까지 경운궁 내 양관인 중명전에서 고종에게 압박을 가하여 마침내 황태자 대리의 조칙을 얻어냈다. 7월 19일에는 서둘러 중화전에서 황태자 대리를 축하하는 의식을 거행하고, 환구단, 종묘, 영녕전, 경효전, 사직에 이를 알리는 고유제(告由祭)까지 지냈다. 고종은 단지 황태자 대리를 승인한 것이지만, 7월 21일에 태황제(太皇帝) 존봉도감 설치가 결정되는 등 고종의 퇴위는 기정사실이 되었다.
7월 22일 친일내각의 대신들은 순종을 대리가 아닌 황제라고 부를 것을 건의하였고, 총리대신 이완용은 연호의 개정을 발의하였다. 7월 24일에는 소위 ‘ 정미조약(제3차 한일협약)’을 체결하고 일본이 법령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에 대한 승인권, 고등 관리 임면에 대한 동의권까지 확보하게 되었다. 일본인 고문을 통한 간접적인 내정간섭이 아니라 대한제국 내각에 직접 일본인 차관을 임명하여 중요 정책 결정과 집행 과정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 것이다.
또한 7월 31일에는 군대 해산의 조칙을 강요해서 대한제국의 주권을 본격적으로 해체하기 시작하였다. 8월 2일에는 새 연호로 융희(隆熙)를 제정하는 한편, 강제로 퇴위당한 고종 태황제의 칭호는 덕수(德壽)로 결정하고, 8월 27일 돈덕전에서 순종 황제 즉위식이 강행되었다.
이후 일본은 1909년 7월 6일, 한국 병합 방침을 최종 확정하고 구체적인 준비를 시작하였다. 1910년 5월 30일, 한국 통감에 겸임 발령을 받은 일본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는 8월 16일에 이완용 총리대신을 통감관저로 불러 병합조약 체결을 위한 담판을 시작하였고, 조약안은 8월 18일 대한제국 내각회의를 통과하였다. 8월 22일 오후 4시, 이완용과 데라우치 통감 사이에 병합조약이 조인되었고, 8월 29일에 병합조약이 공포됨으로써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