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별궁은 태종의 둘째 딸 경정공주(慶貞公主)가 출가해 거주하던 저택으로 소공주댁(小公主宅)으로 불렀다.
지금 소공동의 이름은 소공주댁이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를 가진 소공주동에서 유래한 것이다. 경정공주의 부마(駙馬)는 개국공신(開國功臣) 조준(趙浚)의 아들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대림(大臨)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1583년(선조 16)에 왕은 이 집을 크게 수리해 셋째 아들 의안군(義安君)에게 주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왜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적장 우키타(宇喜多秀家)는 처음에는 종묘(宗廟)에 주둔하였다. 그러나 병사가 폭사하자 이곳으로 옮겨 다음 해 4월 서울을 철수할 때까지 진을 치고 있었다.
서울이 수복되고 명나라 군이 남쪽으로 내려왔을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이곳에 머무르기도 하였다. 1593년 10월선조가 서북 피란지에서 환도한 뒤에는 자주 이곳에 나가 명나라 장수와 관원들을 접견하고 요담하였다. 여기에서 유래되어 왕의 거소(居所)를 의미하는 별궁, 즉 남별궁의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
그 뒤에도 남별궁은 계속 역대 왕의 명나라나 청나라 사신을 접견하는 장소로 쓰여졌으므로 건물의 수리도 특별히 배려하였다. 1778년(정조 2)에는 빈객 접대와 연향(宴享) 등의 일을 맡아보는 관서인 예빈시(禮賓寺)를 이 남별궁 안으로 옮겨 설치하기도 하였다.
또, 청국사신 덕패(德沛)가 누액(樓額)을 쓴 명설루(明雪樓)가 있고, 칙사(勅使)들이 지은 시도 현판에 많이 새겨져 있었다. 후원(後園)에는 또 작은 정자가 있고 돌거북이 있어 영험이 있다고 전한다.
동구(洞口)에는 아름드리 통나무의 두 기둥을 세운 큰 홍살문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그 뒤 1897년에 원구단(圜丘壇)을 세웠으나, 1913년에는 이를 헐고 그 자리에 조선호텔을 건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