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8년(고종 25) 연무공원(鍊武公院)이 설치될 때 내무부부주사로서 조교격인 사첨(司籤)에 임명되어 미국인 군사교관인 다이(Dye)를 보좌하였다. 1902년 무관학교 초대교장이 되어 다이가 한국어로 번역하기 시작한 작전법과 훈련규칙을 완성하였다.
을미사변 직전에 군부참령이 되고 정동파(貞洞派)로서 서양인들과 함께 궁궐에 출입하였으며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에도 관련되었다. 1898년 민비 인산 때에는 각국 공사 반접관(伴接官)이 되었으며, 1900년 부령(副領)과 참장(參將)으로 연이어 승진하고, 원수부검사국장·회계국장서리·육군법원장을 역임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임박하여 이용익(李容翊)과 함께 친로파로 주목되어 위협을 받자, 현상건(玄尙健)과 모의하여 전주로한국참서관(前駐露韓國參書官) 곽광의(郭光義)를 여순(旅順)에 보내 러시아에 보호령을 요청하려고 하였다.
일제가 그들을 일본으로 납치하려는 기미를 보이자 프랑스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가 미국인의 보호로 미국군함 신시내티호를 타고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