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책. 필사본.
종정경(宗正卿)으로 있던 필자가 1894년 4월 25일 조병호의 후임으로 충청도관찰사를 제수 받은 날부터 시작해서 8월 29일 병으로 의원 면직할 때까지의 일기, 정부에 보낸 보고서, 각 군현에 내린 명령서를 모아 놓은 책이다. 그 구성은 일록(日錄), 별계(別啓), 별보(別報), 별감(別甘)으로 되어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간행된 『사료총서』 53집으로 이헌영의 『경와집략』이 간행되었고, 『금번집략』은 그 하권에 수록되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서울에서 태어난 전주 이씨인 필자는 대원군이 집권한 이후 진사와 문과 정시를 통해서 관계에 들어와 1881년 신사유람단의 조사(朝士)로 일본을 견문하였다. 또한 통리기구아문 경리사, 의주부윤, 주일공사, 그리고 경상감사를 역임했고, 지방관과 어사를 지내면서 용만집략(龍灣集畧), 교수집략(嶠繡集畧) 등을 집필하였다.
그는 4월에 충청감사로 임명받았으나, 칭병하며 부임하지 않다가, 6월 14일에야 사은숙배(謝恩肅拜)를 하였다. 이 자리에서 고종은 동학농민전쟁으로 일어난 사태 수습과 청나라 군대의 응대를 강조하였다.
도임한 이후 며칠에 한 번씩 쓴 일록은 대체로 한 두 줄밖에 되지 않는 짧은 기록이다. 별계에는 청나라 군대의 움직임과 청일전쟁의 발발, 청나라 군대의 패주와 그들의 행패, 다시 일본군의 북진과 그에 따른 민심의 동향을 자세히 보고한 문서를 실었다.
또한 7월 초순 이후에는 공주를 비롯한 부여와 임천 등지에서 전개된 동학농민군의 창의 모임과 활동, 주민과의 마찰, 황하일과 임규호 등 주요한 동학 접주가 의병을 칭하며 재봉기했다는 보은군수의 보고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8월 1일 만여 명의 동학농민군이 공주 정안면 궁원에 모여 감사직을 그만두려는 자신을 만류한다는 구실로 창의 모임을 지속한다는 보고서도 볼 수 있다.
별보에는 육상궁(毓祥宮) 하인의 조세미 탈취 사건, 신식화폐령에 따른 세부적 문제에 대한 질의서 두 건만이 있다. 당시 각지에 설치된 유회소(儒會所)와 민회소(民會所)에 보낸 전령(傳令)과 유시(諭示), 각 군현에 하달한 감결(甘結)에는 충청도 지역의 정황이 잘 나타나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인(利仁)에 취회한 동학농민군의 민회소가 상당히 강성했다는 점, 양반유생이 단독, 또는 동학농민군과 연합해서 취회한 자취가 부여와 은진 등지의 유회소에서 엿보인다는 점이다.
공주를 중심으로 한 이 지역은 4, 5월경에도 동학교도들의 취회와 활동이 활발하다가 점점 소강 상태에 빠졌는데, 6월 23일 일본군의 경복궁 침입 이후 다시 동학교도와 양반유생이 곳곳에 취회하며 의병을 칭하였다.
금번집략의 유시와 전령은 창의 움직임을 싣고 있다는 면에서 아주 중요한 자료이다. 또 이에 관련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는 자료로 부여유생 이복영(李復永)이 쓴 남유수록(南遊隨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