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후기 문신 이헌영이 충청도관찰사 재임기간 동안의 사건을 기록한 일지. 공무일기.
개설
내용
그는 4월에 충청감사로 임명받았으나, 칭병하며 부임하지 않다가, 6월 14일에야 사은숙배(謝恩肅拜)를 하였다. 이 자리에서 고종은 동학농민전쟁으로 일어난 사태 수습과 청나라 군대의 응대를 강조하였다.
도임한 이후 며칠에 한 번씩 쓴 일록은 대체로 한 두 줄밖에 되지 않는 짧은 기록이다. 별계에는 청나라 군대의 움직임과 청일전쟁의 발발, 청나라 군대의 패주와 그들의 행패, 다시 일본군의 북진과 그에 따른 민심의 동향을 자세히 보고한 문서를 실었다.
또한 7월 초순 이후에는 공주를 비롯한 부여와 임천 등지에서 전개된 동학농민군의 창의 모임과 활동, 주민과의 마찰, 황하일과 임규호 등 주요한 동학 접주가 의병을 칭하며 재봉기했다는 보은군수의 보고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8월 1일 만여 명의 동학농민군이 공주 정안면 궁원에 모여 감사직을 그만두려는 자신을 만류한다는 구실로 창의 모임을 지속한다는 보고서도 볼 수 있다.
별보에는 육상궁(毓祥宮) 하인의 조세미 탈취 사건, 신식화폐령에 따른 세부적 문제에 대한 질의서 두 건만이 있다. 당시 각지에 설치된 유회소(儒會所)와 민회소(民會所)에 보낸 전령(傳令)과 유시(諭示), 각 군현에 하달한 감결(甘結)에는 충청도 지역의 정황이 잘 나타나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인(利仁)에 취회한 동학농민군의 민회소가 상당히 강성했다는 점, 양반유생이 단독, 또는 동학농민군과 연합해서 취회한 자취가 부여와 은진 등지의 유회소에서 엿보인다는 점이다.
공주를 중심으로 한 이 지역은 4, 5월경에도 동학교도들의 취회와 활동이 활발하다가 점점 소강 상태에 빠졌는데, 6월 23일 일본군의 경복궁 침입 이후 다시 동학교도와 양반유생이 곳곳에 취회하며 의병을 칭하였다.
의의와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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