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구집회 ()

근대사
사건
1893년 초 동학교도가 최제우(崔濟愚)의 신원(伸寃)과 척왜양(斥倭洋)을 목적으로 전라도 금구(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금구면)에서 개최한 집회.
정의
1893년 초 동학교도가 최제우(崔濟愚)의 신원(伸寃)과 척왜양(斥倭洋)을 목적으로 전라도 금구(지금의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금구면)에서 개최한 집회.
역사적 배경

1892년 10월부터 서인주(徐仁周) · 서병학(徐炳學) 등 지도적 동학교도가 중심이 되어 전개하기 시작한 최제우신원운동은, 공주와 삼례에서의 대규모 집회를 통해 중요한 민중운동으로 뚜렷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삼례집회에 대한 관리들의 반응이 냉담하고 동학지 도부의 성급한 해산 결정으로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고 끝나자, 일부 교도들 사이에 불만이 팽배해졌다.

특히, 참가자들 중에는 임진년인 이 해에 조선왕조는 멸망한다고 예언하는 비결(秘訣)을 믿거나, 외국인과 천주교에 대한 강한 배척감을 가지고 있던 교도들이 많았다. 두 집회가 끝난 다음에도 동학교도에 대한 관리들의 침탈이 계속되어, 또 다른 방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았다.

금구집회는 이러한 분위기의 연속선상에서 열렸으나, 동학 지도부의 승인은 얻지 못하였던 듯하다.

내용

이 집회에 관한 기록은 약소하나, 전봉준(全琫準) · 서인주 등 현실 대항적 성향이 강하던 교도가 주도적 역할을 한 것은 확실하다. 때문에 금구집회는 동학의 이전 집회보다 상대적으로 강한 정치적 성격을 나타내었다.

즉, 무엇보다 정치적 색채가 농후한 척왜양을 투쟁의 목표로 확립, 전라감사에게 민소(民疏)하였고, 전국 각지에 그런 뜻을 담은 격문을 보냈다. 특히, 복합상소(伏閤上疏)의 실행 여부를 제대로 결정하지 못하던 동학 지도부에 압력을 가해 상소를 성사시키는 데 일정한 구실을 하였다. 또, 상소가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서울에 사람을 직접 파견, 척왜양의 의지를 표시하기도 하는 등 높은 정치의식을 나타냈다.

그러나 복합상소를 추진했던 교도나 금구집회에 참여했던 교도가 서울에서 서양인의 거주처에 척왜양격문을 붙이는 작업까지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금구집회의 주동 인물들이 기존의 동학 지도부와 전혀 다른 노선과 목표를 가졌다고 보기도 힘들다. 두 집회가 서로 연락 관계를 맺고 있었고, 금구집회 참가자들이 보은집회에도 참가했다는 점에서 보면, 금구는 보은집회로 가던 동학교도들의 중간 집결지이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금구집회의 정치적 성격이 동학지도부가 주도한 보은집회의 그것을 압도한다고는 쉽게 말할 수도 없다. 다만, 이후의 사태 진행과 동학교문의 동향에서 나타난 금구집회 주도 인물들의 선도적 투쟁성과 남접(南接)의 형성은 상호 밀접한 관련을 가졌음이 명확하다.

참고문헌

「동학(東學)의 대선생신원운동(大先生伸寃運動)에 관한 일고찰(一考察)」(장영민, 『백산박성수교수화갑기념론총(白山朴成壽敎授華甲紀念論叢)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의 인식(認識)』, 1991)
「고부민란(古阜民亂)의 연구(硏究)」(정창렬, 『한국사연구(韓國史硏究)』 48·49,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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