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서장옥(徐璋玉, 徐長玉). 1883년(고종 20) 김연국(金演局) 등과 함께 인제(麟蹄)에 있던 최시형(崔時亨)을 방문한 이후 그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30여년간 불도(佛道)로 많은 수양을 쌓은 인물로 신체는 작으나 용모가 특이하여 사람들은 서인주를 이인(異人) 혹은 진인(眞人)이라고 했다.
서병학(徐丙鶴) 등과 동학의 의식과 제도 제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동학에 대한 정부의 탄압이 심해졌던 1889년 서울에서 체포되어 금갑도(金甲島)에 유배되었으나, 최시형이 김연국에게 750냥을 마련하게 하여 서인주를 석방시켰다. 이때 서인주를 위해 하였던 식후고천(食後告天)은 동학의 의식으로 정해졌다.
1892년 7월 서병학과 함께 최시형에게 교조신원(敎祖伸寃)의 뜻을 말했으나 허락받지 못하자, 자의로 교도를 이끌고 충청감사 조병식(趙秉式)과 전라감사 이경직(李耕稙)에게도 교도탄압 중지의 글을 보냈으나 효과를 얻지 못했다. 그리하여 교도에게 통문(通文)을 보내 삼례역(參禮驛)에 집결시켰다.
또 다시 교조신원과 포덕(布德)의 자유를 요구하였으나 이단시되어 퇴거를 명령받자, 재차 소(訴)를 보냈으나 미온적인 반응만 얻었다. 1894년 전봉준(全琫準)과 함께 창의하니 호서남접(湖西南接) 혹은 서포(徐布)로 불렸다. 그러나 북접(北接)은 서인주와 전봉준을 비판하고 토벌군을 일으키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