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방전은 17세기 초엽부터 궁방의 재정을 마련하기 위하여 교통이 편리하고 토지가 비옥한 평야·해안 지방에 널리 설치되었는데, 특히 전라도·황해도에 많았다.
궁방전이 대규모일 경우는 궁전촌 주민 전체가 궁방전만 경작하는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궁방전은 다른 종류의 토지와 혼재되어 분산 배치되었기 때문에, 주민들이 다른 토지도 경작하던 예가 대다수였다.
궁방이 자체의 재력으로 사람들을 모아 궁방전을 개간하는 경우 모인 농민은 토착민인 원거호(元居戶)도 있었지만, 유리민(流離民)으로 거지와 다름 없던 처지의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궁방에서 식량·농기구·종자 등을 지급받았지만, 불안정한 생계 기반 위에 있었기 때문에 도산하는 경우가 빈번하였다.
또한 중답주(中畓主) 내지 사적 지주(私的地主)로 양반·토호가 궁방전의 작인(作人)이 되는 예도 있었지만, 자신이 직접 노동하는 것이 아니라 노비·고공을 사역시켰다.
궁방의 소유지인 제1종 유토(有土)의 궁방전을 경작하는 농민들의 처지는 대체로 열악하였다. 민유지(民有地)인 제2종 유토와 무토(無土)의 궁방전을 경작하는 농민의 처지는 다른 농민과 비슷하였다.
그렇지만 궁방전에서는 전세·연호잡역(烟戶雜役)·군역을 면제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형편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다른 마을 주민은 세와 역의 편중으로 고통을 받았다.
법전에도 없는 이런 면세·면역의 특혜는 농민들의 투탁(投托)을 유발하는 요인이었다. 궁전촌의 주민들은 궁방의 세력을 이용하여 그런 특혜를 계속 유지하려고도 하였지만, 모든 궁전촌이 제역촌(除役村)은 아니었다.
유토궁전촌의 주민은 아전보다는 궁방에서 직접 파견한 궁차(宮差)와 그의 지시를 받는 도장(導掌)·감관(監官)·마름[舍音]에게 생산과정은 물론 생활면에서도 감독·지시·처벌 등을 받았다.
특히 마을마다 보통 한 명씩 선발되는 마름의 횡포는 컸다. 그러나 무토궁방전은 수령이 수세(收稅)를 하였으므로 궁차에게 직접 감독은 받지 않았다.
궁방전의 양안(量案)·행심책(行審冊)을 통하여 볼 때, 궁전촌은 그 기원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잡성촌(雜姓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동성촌인 경우는 드물지 않았나 추측된다.
그러나 시기가 내려올수록 성씨의 종류 수가 줄어드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양반처럼 동성촌을 지향했던 것 같다. 그리고 복합경영체의 성격을 띠고 있던 하층의 농민경영도 점차로 단혼소가족경영(單婚小家族經營)으로 발전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와 같은 변화는 농지의 영세균등화 현상으로 농민경영이 노동생산성·토지생산성의 향상으로 좀더 안정되었고, 농민들이 스스로 실질적 토지소유권을 성장, 관철시켜 나갔음을 말해 준다. 궁전촌은 1894년 갑오경장 이후 궁방전이 역둔토(驛屯土)로 되면서 소멸되었다. →궁방전, 제역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