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은 고려태조가 개성에 왕도를 정하고, 시가지를 조성할 때 시전(市廛)을 세웠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또 1208년(희종 4) 광화문(廣化門)에서 십자가(十字街)에 이르기까지 1,008영(楹) 규모를 가진 대시(大市)의 좌우 장랑(長廊)을 다시 지었다고 하며, 장랑의 각간(各間)에 통상(通商) 등의 현판이 붙었다는 것으로 보아 큰 규모이며, 조선시대 서울의 시전과 유사한 구조로 배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도 개성의 남대문을 중심으로 동서를 가르는 큰 거리의 양편에 위치했던 상점은 바로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는 제도를 본뜬 것이라고 추측된다.
개성시장은 이 시전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개성시전의 거래 품목은 불분명하지만, 쌀·소금 등과 같은 일상 필수품에서부터 외국에서 수입된 비단과 같은 사치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민간 상인만 상행위를 하였던 것이 아니라 국가가 전매권을 가지고 있던 소금은 관리들이 염포(鹽鋪)에서 판매하기도 하였다.
시전은 물가조절을 주로 관장하는 경시서(京市署)의 감독하에 있었으며, 불공정거래자는 처벌까지 받았고, 금속화폐가 강제로 유통되기도 하였다.
또한, 시전은 사신의 영송(迎送)·과렴(科斂)·연례(宴禮) 등과 같은 국역을 부담해야 했고, 관청에 물자를 조달하기도 하였다. 때문에 관리들의 침탈을 받았지만, 국역 부담의 대가로 금난전권(禁亂廛權)과 유사한 영업독점권을 행사하였다.
전통시대의 시전은 중앙정부의 물자조달과 비호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으므로 개성시장은 고려가 멸망하자 점차 쇠퇴하여 조선이 서울로 천도한 뒤에는 일시적으로 폐쇄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개성은 고려의 옛 도읍지였고, 서울과 근접한 사신 행차의 길목에 있었던 이점 외에도 개성상인들의 상인정신·조직·상술 등으로 상권이 전국에 미쳐 상업의 요충지가 될 수 있었다.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개성시장에는 백목전(白木廛)·지전(紙廛)·어과전(魚果廛)·남초전(南草廛)·미전(米廛)·유기전(鍮器廛) 등이 비록 서울의 육주비전(육의전)보다 작은 규모지만 존재하였고, 연행 사절의 비용, 관청의 물품과 경비 등의 국역을 부담하는 대가로 금난전권과 자금 융자 같은 특혜도 받고 있었다.
특히, 그 중 사대전(四大廛)은 취급 품목은 알 수 없지만, 서울의 육주비전에 비할 수 있는 것이었다. 사대전은 대관청활동, 개성상업계 감독, 상인간의 분쟁 해결, 외지 행상자 보호 등 계의 기능을 수행하는 독자적인 회의를 운용하고 있었다. 관청에서도 사대전의 권능을 어느 정도 인정하였으며, 따로 별장(別將)이나 색장(色掌)을 두어 사대전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개성시장에서 거래되는 중요 물품은 조선 전기에는 중국의 수입품이었고, 후기에는 인공 재배에 성공한 인삼이었다. 인삼은 연행 사절의 비용 조달원이 되고, 팔포무역(八包貿易)의 핵심이었으므로, 개성상인이 개성 근지에서 재배한 인삼은 전매품인 홍삼과 함께 개성의 특산물이었다. 그 밖에 피물(皮物)·미곡(米穀)도 거래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시장의 매매에는 도매(都賣)와 산매(散賣)가 있었고, 좌상과 행상에게만 판매하는 도매에는 항상 거간(居間)이 개입하였다. 특히, 신용에 의뢰하는 외상판매가 대단히 성행하여 싸고 사소한 물품이라도 1, 2개월의 기간을 두고 값이 지불되었다.
물론 금액과 지불기간에 따라 이자가 붙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에도 보통 포목전의 경우 1년 매상고가 2백 척(隻, 1척은 20필)에 달하였다.
이렇게 상거래가 활발하였으므로 다른 곳에서는 아직 유통이 제대로 되지 않던 금속화폐가 개성에서는 일찍부터 주조·유통될 수 있었고, 그 밖에도 여러 가지의 독특한 상사제도와 관행이 형성되었다. 즉, 사개송도치부법(四介松都治簿法)이라는 복식부기법, 일종의 도제제도(徒弟制度)인 차인제도(差人制度), 각종 전계(廛契)·시변(時邊)·의변(義邊)·시변(市邊) 등의 금융제도가 그것이다.
또한, 개성상인들은 사월초파일의 화제(花祭), 단오와 같은 특이한 풍속을 지녔다.
그런데 개성시장은 좌상에 의한 상설시장으로서는 활발했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비상설의 정기시장으로서는 미미하였다. 19세기에 나온 《임원십육지 林園十六志》나 《증보문헌비고》에도 개성의 정기시장은 보이지 않는다.
정기시장이 개성에 나타난 것은 개성의 상업계가 개항 이후 상업 중심지가 개항장으로의 이동, 교통통신의 발달, 근대적 상업제도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위축된 이후이다. 상설시장과 다름없이 매일 장이 섰으나 거래는 빈약하였다. 다만, 약령시(藥令市:봄·가을에 약재를 팔고 사던 장)가 새로 등장하였을 뿐이었다.
또한, 개성시장의 발달은 행상의 활동에서 찾을 수 있다. 개성상인들은 외지에 선상(船商)·육상(陸商)과 같은 행상으로 나와, 그들만의 활동 거점인 송방(松房)을 중심으로 활발한 상행위를 하였다.
그들의 상권은 거의 전국에 뻗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도 이곳에 가깝던 개성상인 중 다수가 행상으로서 그 이전의 전국적 상업권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황해도·경기도 각지, 충청도 강경·예산, 강원도 철원·평창, 부산 등지에서 활동하였고, 멀리 중국·일본까지 진출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