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례집회가 개최되기 전에 1,000여 명의 동학교도들은 이미 공주에서 집회해 충청감사 조병식(趙秉式)에게 최제우의 신원을 요구하였다.
이 공주집회는 비록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조병식으로부터 동학교도에 대한 관리의 침탈을 금지한다는 약속을 받아냈기 때문에, 다시 전라감사 이경직(李耕稙)에게도 신원을 정소하기 위해 또 다른 집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집회지는 전라도뿐 아니라 충청도의 교도들도 쉽게 참석할 수 있는 교통의 요지인 삼례가 선정되었다. 재차 삼례에 모인 수천명의 동학교도들은 이경직에게 최제우의 신원과 관리의 탐학 금지, 그리고 이런 사실의 중앙정부에로의 보고를 몇 차례 요구하였다. 그러나 감사로부터 자신은 권한이 없다는 말 이외에는 다른 만족할 만한 대답을 듣지 못하였다.
이런 결과에 대해 참가 교도들은 크게 반발했으나, 손천민(孫天民)을 비롯한 지도부의 거듭된 권유로 해산하고 말았다. 이후 동학은 여전히 사교라는 혐의를 벗어나지 못했고, 교도들 또한 관리들의 침탈을 면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삼례집회가 동학과 그 이후의 사태 전개에서 차지하는 의미와 비중은 상당히 크다. 첫째, 참가교도들이 강렬한 종교적 열망과 현실대항적 정치의식이 중대하게 나타났다. 둘째, 불안정한 면모를 보이던 최시형(崔時亨)의 종교적 권위가 재천명되기도 했으나, 대항적 성격이 강한 교도들이 이 집회 이후 다른 노선을 취하기 시작하였다.
셋째, 외국인과 천주교에 대한 대립의식이 분명하게 표출되어 척왜양(斥倭洋)의 목표가 설정될 수 있는 기반이 형성되었다. 넷째, 이러한 교도들의 분위기는 지도부가 인정하지 않은 금구집회(金溝集會)가 열리도록 하였고, 서울에서의 복합상소(伏閤上疏)를 결행하도록 한 원동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