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대한제국기 성도주를 역임한 천도교인.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1893년 서울에 올라가 복합상소(伏閤上疏)를 하여 교조신원(敎祖伸寃)을 요구할 때, 상소문을 지었고, 서병학(徐丙鶴)의 무력사용을 저지하였다. 그리고 보은 장내(帳內) 집회에 청의대접주(淸義大接主)로 참가하였다.
1894년 9월 동학 제2차 봉기에 최시형의 지시에 따라 청안(淸安) 근방의 각 포(包)를 기포시켜 청주 북면에 1만여 명이 회합하였다. 이들은 관군과 교전했으나 대패하고 장내로 물러났다. 이후 영동·용산 등지에서 교전했으나 패하자 동학군은 해산하고 손병희 등과 함께 최시형을 모시고 강원도 쪽으로 피신하였다.
그 뒤 체포의 위험이 어느 정도 사라지자 포교 활동을 재개하였다. 1896년 최시형이 그를 비롯하여 손병희·김연국(金演局) 등에게 도호를 내리며 세 사람이 합심해 교를 이끌어가도록 하였다. 그러나 최시형이 순도(殉道)하자 손천민과 김연국의 순사 주장과 손병희의 복수 주장이 엇갈리면서 갈등이 나타나며 분열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의 파들은 세력이 미약해 부득이 손병희파에 합류할 수 밖에 없었다. 1900년 손병희가 입도식(入道式)을 행할 때 박인호(朴寅浩)가 상위자가 되고 손천민은 성도주(誠道主)가 되었다.
최시형이 순도한 뒤 정부의 지목을 피하지 않고, 그 해에 체포되어 모든 책임을 지고 교수형을 당하였다. 아들 손재근(孫在根)은 천도교에서 분립하여 천도명리교(天道明理敎)를 세웠다.
참고문헌
- 『천도교백년약사』 상(천도교사편찬위원회, 1981)
- 『동학란기록』 상(국사편찬위원회, 1974)
- 『동학사(東學史)』(오지영, 영창서관,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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