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서병학(徐丙學). 충청북도 충주 출신. 1880년대 서인주(徐仁周) 등과 동학에 입도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1890년대 초에 전개되는 교조신원운동 당시 사실상의 주도자로서, 7월부터 당시 동학교주 최시형(崔時亨)을 설득해 교조(敎祖)의 신원(伸寃)과 동학교도들에 대한 관(官)의 부당 주구(不當誅求)에 반대해, 전라도 삼례(參禮)에서 동학교인들을 모아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전라도관찰사 이경직(李耕稙)으로부터 부당 주구를 금지하는 명령을 받아냈으나, 이경직이 확약한 부당 주구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동학에 대한 관의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이에 최시형을 설득해 1893년 2월의 서울 복합상소운동(伏閤上疏運動)을 적극 주도하였다.
복합상소를 이용해 교도들에게 군복을 입히고 병대(兵隊)와 협력, 정부간당(政府奸黨)을 소탕하고 조정을 대개혁할 것을 결정, 행동에 옮기려 했으나 보수파의 반대로 중지하였다.
이에 ‘외교배척(外敎排斥) 외상축거(外商逐去)’를 요구하는 글을 서울의 기독교회와 각국 영사관 벽에 붙이는‘괘서사건(掛書事件)’을 주도하기도 했으나 이 또한 실패하였다.
같은 해 3월 충청도 보은에서 ‘척왜양(斥倭洋)’의 기치를 내건 동학의 ‘보은취회(報恩聚會)’를 적극 주도하였다. 이 당시의 위치는 ‘차좌(次座)’였으나 사실상의 보은취회 주도자였다. 그러나 양호선무사(兩湖宣撫使) 어윤중(魚允中)의 해산 명령 이후 동학의 상층 지도부가 몰래 도망, 보은취회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서병학의 혁신적 노선은 1892∼1893년의 동학교조신원운동에 당시 농민층들의 반봉건·반침략의 요구를 일정하게 반영함으로써, 1894년에 일어났던 동학농민전쟁의 역사적 선구로 작용하였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즉, 1894년 전봉준(全琫準)이 주도한 동학농민전쟁은 혁신파였던 서병학의 노선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