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1운동 직후 일제의 식민정책이 이른바 문화 통치라는 이름 아래 유화 국면으로 접어드는 틈을 이용하여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기 위한 움직임이 사회·문화·경제·교육의 각 분야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경제계에서는 민족 산업의 육성과 경제 자립을 위한 대중운동으로 한말의 국채보상운동과 맥락을 같이하는 물산장려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금주단연운동은 이같은 물산장려운동의 한 형태로 일어났으나, 1923년부터는 거의 매일 금주회나 단연동맹회에 대한 보도가 나올 만큼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일어난 전민족적 운동이 되었다.
즉, 1922∼1923년에는 단연회·단연동맹회·단연금주회·금주단연회·금주단연동맹·단연금주동맹·금주회·금단주연회 등 수많은 금주단연운동단체가 전국적으로 조직되어 활동하게 되었다.
이들 금주단연운동단체들은 전국 각지의 대도시와 소읍에까지 파급되어 조직되었으며 면사무소나 천도교 및 기독교와 같은 종교단체, 심지어 각종 회사나 당시의 철도 회사에까지 파급되었다.
금주단연운동단체의 활동은 먼저 회(會)를 결성하고 이들 회가 중심이 되어 솔선하여 금주단연을 실천하면서 전단배포·강연·시가행진 등을 실시하였다. 또한, 절약된 금액으로 생산 기관을 설립하고자 한 단체도 있었으며, 금주단연의 약속을 어기는 자는 벌금을 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초기에 민족적 자각에 호소하여 열렬한 호응을 얻었던 이 운동도 1920년대 후반에 이르러 일제의 간섭과 탄압, 그리고 국내 민족 운동가 중 사회주의자들의 심한 반발로 점차 약화되어 갔다. 특히, 사회주의자들의 반발은 1923년 2월 3일 서울에서 열린 대강연회 때부터 비롯되었다.
그들의 주장은 민족항일기에서의 민족 기업 육성은 불가능하며, 이같은 경제 자립 운동으로 다소 산업이 발달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본가를 위함이요 조선의 무산자(無産者)에게는 하등 관계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930년대 후반에 이르러 거의 소멸되었다.
이 운동은 3·1운동 이후 민족의 실력을 배양하고자 하였던 새로운 단계의 민족주의 운동으로서 그 의의가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일제의 문화 통치에 역이용 당한 타협주의의 소산이며, 3·1운동의 정신에서 크게 후퇴한 독립 사상의 변질이라는 비판도 있다.
또한, 사회주의자들의 반발을 야기하여 1920년대 이후 민족운동의 분열의 단초가 되었던 점도 없지 않다. →조선물산장려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