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0년대 무렵의 국자도고(麯子都賈)가 그 연원이다.
1880년대 한국에는 근대적 공업이 맹아적 형태로 발전하고 있었다.
국자도고는 그 대표적인 형태로서 다른 도매상들이 엄하게 금지된 것에 반해, 정부기관의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장려되거나 정부기관의 부속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1885년 4월평안북도 순천군의 국자도고와 성천부(成川府)의 국자도고를 제중원과 통리아문에 부속시키고 각각 감관(監官)을 내려보낸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같은 해에 병설된 전주 경내의 국자도고에 대한 수세액이 1년에 2천냥으로서, 봄○가을에 각 1천냥씩 상납하게 되어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주된 이유는 관부의 경비 조달이었다.
이와 같이 1880년대 이래 경비를 조달할 목적으로 관부에 부속되어 오던 국자도고는 민족 항일기에도 꾸준히 존속, 그 규모가 확대되어 갔다.
1919년의 소주 생산액이 962만 9481원, 그 뒤 10년 후인 1929년의 생산액이 1530만 1270원으로 증가된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국자(누룩)의 양조는 처음에는 주로 서북한 지방에서 많이 이루어졌으나 점차 남한 지방에서도 그 산액이 증가되어 갔다. 한편, 일본인의 이주 증가에 따라 일본의 양조회사가 점차 국내 시장에 침투하기 시작해, 1920년대 이후에는 우리나라 사람이 경영하는 국자회사와 일본인이 경영하는 양조회사 사이에서 분규가 발생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우리나라 국자회사들은 국자개량조합과 같은 형태의 연합조직을 결성, 부당한 일본 양조회사의 횡포와 일제의 편파적 정책에 대항하기도 하였다.
국자회사는 전통적인 민족자본의 형태로서 1880년대부터 발전하기 시작해 민족 항일기에서도 꾸준히 그 규모가 확대되어 갔으며, 우리나라의 공업 발전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